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월 moon Apr 02. 2024

그의 개수작은 진짜였다

#플러팅#연애시절#피아노치는남자

봄이었다.

따뜻한 계절이 한창일 무렵.


아직 연애를 시작하지 않을 때였다.

현 남편이 된 피아노 치는 남자가 문자를 보내왔다.


"누나, 뭐해요?"


나는 전날 개인상담을 받고 집에 와서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나의 첫 번째 브런치북 "생각보다, 다정한 세상"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나는 알코올중독자인 아빠를 두었고, 그 과정에서 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을 쏟은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개인상담은 그로 인한 것이었다.


우리는 따뜻한 봄날에 만나서 같이 밥을 먹고,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정말 밥을 먹자고 나를 찾아왔네. 평소에 말이 많지도 않은 애가 웬일이야.'


지금도, 그때도 내향인인 이 남자의 연락과 만남은 의외였다.

한번 밥을 사 줄 테니 찾아오라는 인사치레를 진심으로 받고, 가깝지도 않은 먼 길을 찾아오다니. (차로 2,30분)

놀랄 일이었다.


근처 공원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물었다.


"너는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야? 세종대왕, 이순신.. 이런 돌아가신 위인들 말고. 정말 네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


지금 생각해 보면 흔하디 흔한 이 질문이 왜 그때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이십 대 시절의 풋풋함에 웃음이 난다.


"아버지요."


"진짜?"


"네, 아버지요. 아버지 존경해요."


아버지를 단 한순간도 존경스럽게 여겨본 적 없는 나는 이 대답이 신기했다.

진심인지 의심했다.

진짜냐고 물었고, 진짜라고 대답했지만 그때 나는 믿지 않았다.

그의 개수작이라고 여겼다.

요즘 말로 플러팅.






지난 주일은 시아버지의 생신이셨다.

아버님이 출근을 하셔서 생신파티는 한 주 미뤄졌다.

대신에 교회에 가기 전, 온 가족이 모여서 아버님께 전화를 드리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드렸다.

어머님께 전해 듣기로는, 아버님께서 일하시다가 받은 전화에 무척 행복해하셨다고 했다.

이럴 때면 마음이 흐뭇해지고, 행복함과 만족감으로 가득 채워진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이 편안한 행복감.


우리 부부가 결혼하던 해에 아버님은 30년 넘게 다니시던 회사에서 정년 퇴직하셨다.

아버님은 주, 야간을 번갈아 근무하시던 생산직 직원이셨다.

여러 과정이 있지만 아버님은 한 직장에서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시면서 일하셨다.

내가 태어나 본 수많은 사람 중에 가장 성실한 분이 아버님이시다.

(퇴직 후 아버님은 또다른 직장을 구하셨고, 지금까지 여전히 성실하게 일하신다.)


성실이라는 성품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도,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성품이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깊이 느낀다.

젊은 동안 잠깐 반짝하며 연습을 해도 일생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성품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결혼을 하고 1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결같이 성실한 아버님의 모습은 진심으로 마음깊이 존경스럽다.

사소하게는 약속이나 모임 시간에 늦지 않으신다. 회사에 결근하시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왜 없으셨겠는가.

하지만 아버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무책임하게 떠나버리신 적이 없다.


교회를 섬기는 직분 중에 주차봉사를 오랜 시간 하셨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한여름에는 햇빛이 쨍쨍하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도 아버님은 그 자리에서 주차봉사를 하셨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하시면서도 성실하셨다.

아버님의 삶은 진심으로 존. 경. 스러웠다.


몇 년 전, 남편에게 물었다.


"어머님이랑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당신 어떨 것 같아?"


부모의 존재가 늘상 짐이었던 나는 부모님이 오히려 안 계시는 편이 낫다고 수없이 생각한 나쁜 딸이다.

하지만 시부모님의 존재는 달랐다.

결혼 후 뵈어 온 모습들만으로도 나에게 역시 존경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분들이셨다.

나에게도 두 분의 존재는 늘 버팀목이고 비빌 언덕이셨다.

하물며 남편에게는 어떠할까.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상상이 안 되는데."


나도 그렇다.

한때 남편의 개수작이라고 생각했던 대답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게도 같은 질문을 누군가 던진다면, 나의 대답도 같다.


우리 부부의 좋은 모델이 되어주시는 시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말씀을 이번주에 꼭 드려야겠다.

이전 09화 장이 우울한 남자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