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나빠 Oct 05. 2020

관리자와 실무자 사이의 딜레마

제너럴리스트 vs. 스페셜리스트


대기업의 직급체계는 참 간단합니다. 사원-대리(선임)-과장(책임)-차/부장(수석)-임원-천상계. 최근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 ‘-님’ ‘-프로’ 등의 통일된 호칭을 도입하고는 있지만 호칭은 호칭일 뿐 직급과 위계는 여전히 존재하죠. 학부 졸업 후 바로 입사를 하게 되면 사원부터, 석박사 졸업 후 입사하면 대리나 과장부터 시작합니다. 일단 입사 후부터는, 짧게는 다음 직급으로 승진을, 길게는 직장생활의 꽃인 임원을 향해 달리게 되죠. 출발선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외는 없습니다. 은퇴까지 최종 목적지는 결국 하나. 부장 아니면 임원입니다.


관리자의 낮과 밤


고도성장을 하던 경제개발 시대에는 직급이 곧 위치를 의미했습니다. 말 그대로 과장은 ‘과()’를, 부장은 ‘부()’를 대표하는 관리자였죠. 하지만, 경제성장이 정체되면서 기업은 신입 채용을 줄이고 내부 인력 위주로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한을 채운 인력들이 하나둘 승진하여, 과장, 부장의 수가 사원, 대리의 수를 압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국가가 출산율이 감소해 인구절벽을 맞듯, 회사에서도 중간 직급이 두터워지는 인사적체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죠.


80년대와 현재 대기업의 신분계층. 출처: 뇌피셜.


회사는 직급과 별개로 관리자를 위한 별도의 호칭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보직’ 내지는 ‘직책’이라 불리는 것들이죠. 예를 들면 TL/AL(Task/Activity Leader)-PL(Project Leader)-그룹장-랩장-팀장과 같은. 이런 보직장이 되면 본격적으로 관리자의 업무를 하게 됩니다. 업무를 조직원에게 배분하거나 일정을 관리하고, 매주 상사에게 보고할 자료를 만듭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사의 보고 자료까지 만들죠. 담당 조직의 회의를 주관하고, 상사가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상사 부재 시 상사가 참석해야 할 회의에까지 참석합니다. 업무라는 것이 유관 부서와도 얽히고설키기 때문에 수시로 타 부서 관리자들과 회의도 해야 하죠.


이는 그나마 정기적인 관리자의 업무입니다. 프로젝트 착수, 중간 점검, 완료 보고 등 그룹장급이 경영진에게 해야 할 중요한 ‘보고’ 일정이 잡히면, 해당 그룹은 몇 주 전부터 비상사태에 돌입합니다. 완벽한 발표자료를 위해 그룹장은 PL, AL을 불러 밤늦게까지 마라톤 회의를 하죠.


로드맵, 테이블, 그래프, 그림이 삽입된 아름다운 발표자료는 그렇게 중간 관리자들의 불같은 야근을 거쳐 탄생합니다. 발표를 무사히 마친 그룹장은 ‘임원 되기 퀘스트’에서 +1점을 획득하게 되죠. 득의양양해진 그룹장은 고생한 부하직원에게 "수고했다"라는 말을 건넵니다. 회식자리에서 술 한잔 따르면서. 관리자의 낮과 밤은 그렇게 회의-보고-자료 작성의 시간으로 채워집니다.


사무실의 조명으로 야경이 너무나도 멋진 사업장. 출처:https://news.samsung.com


전문성과 적자생존의 기로


문제는 ‘보직’이 없는 절대다수의 중간 직급, 특히 부장급의 간부들에게 일어납니다. 애초에 자신의 조직이 없기 때문에 눈에 띄는 실적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고, 하위 직급자들을 제어할 고과권도 없어 입지도 위태해지죠. 조직 개편의 풍파를 겪으며 ‘업(業)’은 수시로 변해 경력에 일관성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급여 밴드가 높다는 이유로 구조조정 시즌이면 희망퇴직, 권고사직 대상이 되기도 하죠. 부장으로 은퇴를 하는 것이 임원이 되는 것보다 어려운 슬픈 현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일단 ‘관리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실무’를 오래도록 하고 싶어도 말이죠. 크건 작건 자신의 조직이 있어야 하고, 그 조직의 실적이 곧 자신의 방패가 되니까요.


그런데, 한번 관리자가 되면 회의-보고-자료 작성의 무한루프에 빠지게 됩니다. 직접 실무를 하는 시간은 사라지죠. 실무를 접하는 것은 후임자에게 ‘보고’를 받는 시간에 국한되고 결국 전문성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요즘과 같이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는 시기에는 관리자가 실무자 시절에 쌓았던 스킬 셋, 역량은 더 이상 업계에서 통용되지 않은 죽은 지식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개발자나 연구원들이 연차가 쌓여 과장, 차장이 되면 진로에 대한 딜레마에 빠집니다. 관리자가 되면 '전문성'을 잃을까 봐, 실무자로 남으면 '잉여인력'이 될까 봐.


자신이 리더십도 있고 적성에도 맞아 관리자의 길을 선택하더라도 또 다른 불안감은 찾아옵니다. 임원이 될 수 있는 0.8%의 확률은 너무나 높은 벽으로 다가오죠. 혹시 뒤늦게라도 이직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실무에 대한 '전문성'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테고, 그동안 쌓은 '관리능력'이라는 것도 경력으로 삼기에는 너무나도 추상적입니다. 시대와 회사가 요구하는 '제너럴리스트'의 끝은 너무나도 허망해 보입니다.


반면,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어 실무자로 남기 고집하면 결국 도태될까 봐 두렵습니다. 조직의 의사결정 라인(chain of command)에서 벗어나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가 됩니다. 책임을 포기하는 대신 권위도 사라지죠. 치고 올라오는 후배, 나이 어린 상사 앞에 남는 것은 구겨지는 자존감일 테죠. 때늦은 후회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무원이 될걸.


미국의 저술가이자 강연자인 Andrew Sobel은 일단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여기에 깊이를 더해 제너럴리스트가 되라고 한다. 출처: https://andrewsobel.com/


선택을 강요받지 않는 삶


연구소에 근무하던 시절 당시 상사였던 그룹장이 제게 해 준 말이 있습니다.


"연구원은 0에서 1을 만드는 사람이고, 관리자는 1에서 100을 만드는 사람이다."


훨씬 더 큰 숫자를 예를 든 것을 보면, 상사는 관리자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저 '1'이라는 숫자가 훨씬 더 크게 느껴졌죠. 아직까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시도하는 일, 시행착오를 겪을 지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에 더 가슴이 뛰었습니다.


저는 관리업무보다 실무가 더 좋았습니다. 보고서 작성보다 코딩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즐거웠죠.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관련 기술을 계속 공부해 나갈 때,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직접 구현해 냈을 때, 성과를 정리해 학회에 논문으로 발표하고 업계의 인사들과 교류할 때 더 큰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관리자가 되어도 실무를 놓지 않았습니다. 대신 업무강도는 2배가 되었죠. 낮에는 많은 회의에 참석하고, 밤에는 연구와 구현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 둘 중 하나를 선택을 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둘 다 고집하다가는 어느 한쪽도 제대로 해내기 힘들어지니까.


일본 프로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는 투수-타자 겸업을 하는 *이도류(二刀流)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선수였지만, 메이저리그에 와서도 이도류를 고집하다가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어느 쪽도 특출 나지 않은 평범한 선수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도류(二刀流): 일본 검술에서 양손에 하나씩 무기를 들고 싸우는 방식 및 유파를 말한다. 이를 빗대 일본 야구계에서는 투타겸업 선수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한다. 출처:나무 위키


고뇌하는 오타니 쇼헤이. 한일전 때 내로라하는 한국 타자들은 그의 공에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사진출처: https://www.dailyrepublic.com


미국에 온 뒤로는 실무자로 살고 있습니다. 매니저와 엔지니어의 커리어를 환연히 구분하는 이곳의 조직 문화가 저를 자유롭게 합니다. 관리업무는 철저히 매니저가 담당하고, 실무자는 오롯이 연구개발에 집중할 수 있게 하죠. 관리자-실무자의 이도류가 필요 없습니다. 실무자의 경험이 존중되고 경력을 쌓아 기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이 곳, 실리콘 밸리가 어쩌면 제게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관리자-실무자의 딜레마에서 끝내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던 제가 그토록 원하던 Full-Time 연구자의 삶을 살 수 있으니 말이죠.  

가나안: 시나이 반도와 아나톨리아 사이에 있는 해안지역을 가리키는 옛 지명.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요단 강 서부 지역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창세기 12장, 15장) 시절부터 히브리 민족에게 주기로 한 약속의 땅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헤매던 중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목표하던 곳이다. 출처:나무 위키


가끔씩 관리자로 살았던 한국에서의 삶이 생각나곤 합니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동료 AL과 회의실에 남아 새벽까지 그룹장과 발표자료를 가다듬던 그 시간은, 비록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억일지 몰라도, 아스라한 추억의 한 장면으로 떠오릅니다. '관리자의 낭만'이란 것이 있다면 이런 감정이 아닐까 싶군요.



- 예나빠.


ps.


<실리콘 밸리 회사의 직급체계는 어떻게 되나요?>

실리콘 밸리의 Tech기업들의 직급체계는 한국 대기업처럼 획일적이지 않다. 통상 매니저라 불리는 관리직군과 엔지니어라 불리는 실무 직군으로 구분되고, 매니저는 Manager-Senior Manager-Director-Vice President (VP)-Executive VP 등으로 직급체계가 구성되고, 엔지니어는 Engineer-Senior Engineer (SE)-Principal Engineer (PE)-Senior Principal Engineer 등으로 직급체계가 구성된다. 이는 하나의 예로 든 경우로, 실제로는 회사별 업종별로 다양한 호칭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리자와 실무자의 커리어가 확실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매니저는 프로젝트 관리업무 전반을 담당하고, 실무자는 실제 프로젝트의 실무를 수행한다. 한국과 유사하게 매니저도 주니어 시절에는 실무자였던 경우가 많다. 경력을 쌓아가며 본인의 성향에 따라 진로를 선택하곤 한다. 다만, 실무자든 관리자든 진급(Promotion)을 할 수 있는 트랙이 별도로 존재하며, 자신의 전문성을 계속 발전시켜 '스페셜리스트' 또는 '제너럴리스트'가 될 수 있다.
이전 02화 내 경력이 시들어간다고 느껴질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