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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대한 오해

우리가 당황한 한국사

by 이문영 Mar 01. 2025

3.1 만세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에 참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건도 바로 3.1 운동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3.1 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왕조였던 대한제국이 멸망한지 불과 9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는데 불구하고, 우리는 왕조를 부활하는 대신 공화국의 시민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실로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3.1 운동을 별 거 아닌 만세나 부르다 실패한 사건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보니 대충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로 3.1 운동을 평가하곤 한다. 그런 당황스러운 오해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민족대표 33인 (민족기록화)민족대표 33인 (민족기록화)


1. 3.1 운동 민족대표는 대부분 변절했다는 썰

거짓말이다. 3.1 운동 민족대표는 모두 33인. 이 중에 변절자는 단 세 명이었다.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외에 3.1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백업 요원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도 포함된다. 이 백업 요원들까지 합해서 총 48명이 되는데, 그렇게 보아도 불과 4명의 변절자가 있었을 뿐이다. 3.1 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는 고문에 미치거나 사망하기도 했고 불구의 몸이 되어 풀려난 뒤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민족대표는 풀려난 뒤에도 일제의 감시를 받아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갔다.

2. 3.1 운동 민족대표는 만세나 부르면 독립할 줄 믿은 멍청이라는 썰

전혀 아니다. 3.1 운동이 일어난 배경에는 '민족자결주의'가 있었다. 미국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918년 1월과 2월에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바 있다. 윌슨은 미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민족이 국제회의나 적대국 사이의 합의에 의해 한 통치자에서 다른 통치자로 양도될 수 없다. 민족적 열망은 존중되어야 한다. 민족은 그들 자신의 동의에 의해서만 통치될 수 있다. 자결은 단순한 관용구가 아니다. 그것은 절박한 원리다.


이에 앞서 1917년 10월 29일에 미국 뉴욕에서 약소민족동맹회의가 열렸었다. 이 대회에 박용만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대표로 참석했다. 여기서 세계 제1차대전의 마무리를 위해 열리게 되는 파리평화회의에 약소민족 대표자도 참여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나왔다. 이 회의는 1918년 12월에 다시 열렸다. 여기에 한국 측은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을 대표로 참석시키고자 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있다가 참석하지 못했다. 뒤늦게 온 이승만은 정한경과 함께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 위임통치' 청원을 제출했다. 독립이 아니라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면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건 나중의 일이고 이 회의에 참석한 일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도쿄 유학생 그룹과 천도교의 손병희 등은 큰 감명을 받았다. 

이들은 파리평화회의에 우리가 독립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을 알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거족적인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권동진은 재판 때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이 씨앗을 뿌려두면 언젠가는 반드시 싹이 트고 누군가 독립의 뜻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곧바로 그 결과까지 보려 한 것은 아니다.


민족대표들은 민족자결의 원칙으로 조선이 곧바로 독립할 것이라는, 그런 낙관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3. 3.1 운동은 고종 장례식 때 맞춰서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썰

1918년 11월, 상하이에 있던 일군의 조선 청년들이 신한청년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여운형이 주도한 당이었다. 11월 27일 여운형은 윌슨 대통령의 비공식 특사 찰스 크레인을 만났다. 민족자결원칙에 대해서 들은 여운형은 파리평화회의에 조선 대표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여운형과 장덕수가 만든 청원서는 2.8독립선언서에 영향을 주었다. 신한청년당은 독립운동을 촉발시키고자 선우혁을 조선에, 장덕수를 일본에, 여운형을 블라디보스톡에 파견한다. 장덕수는 도쿄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독립선언서가 나온 이후에 조선으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었다. 2.8독립선언은 도쿄의 조선기독교회관에서 2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다. 도쿄 유학생 그룹은 조선으로 송계백을 파견했는데 이때 송계백은 와세다 대학 선배인 민족대표 현상윤을 만났다. 이때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갔는데, 이 독립선언서가 천도교 사람들을 격동시켰다.

천도교는 3.1운동의 방침을 이렇게 정했다.

1.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2. 전 조선에서 시위 활동을 한다.
3. 조선총독부에 독립의견서를 제출한다.
4. 파리평화회의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의견서와 청원서를 보낸다.

한편 이때 북쪽에서는 신한청년당에서 파견한 선우혁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민족대표 양전백 목사를 만나 민족자결주의의 세계적 흐름을 설명하고 우리도 지금 나서야 한다는 것을 설파한다. 선우혁은 남강 이승훈, 길선주 목사 등을 접촉해서 독립 시위의 불길을 일으켰다.

또한 서울의 학생들도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가 주동자였다. 그는 학생 대표자들을 만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도쿄의 유학생들과 힘을 합쳐 독립선언을 하자는 주장을 했다. 이들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힘을 합치자 그에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이처럼 3.1 운동은 여러 단계를 거쳐서 철저히 준비되었던 것이다.

4. 민족대표는 술집에서 딩가딩하다가 자진해서 잡혀갔다는 썰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리는 것은 순탄치 않았다. 잡혀가면 내란죄로 사형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33인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갑성은 젊은 나이여서 민족대표로 올라가기 어려웠지만 인원을 채우지 못하자 자신이 서명하겠다고 말하여 들어갔다. 나중에 변절자가 되는 정춘수는 본인이 승낙한 바가 없는데 추천을 받아서 이름이 올라갔다. 정춘수는 자기 이름이 들어간 것을 알고 놀라서 일경에 자진 출두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족대표 29명(4명은 지방에 있었다)은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식을 했다.  학생들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있었는데 민족대표는 격앙된 분위기에 폭력 사태가 벌어지면 피해가 클 것을 우려해 그곳에 가지 않았다. 뒤늦게 이 일을 안 학생 대표들이 태화관으로 달려와 파고다 공원으로 가달라고 했으나 손병희가 거절했다. 민족대표는 독립선언식을 마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사히 독립선언식을 마치고종로경찰서에 독립선언서를 보냈다. 종로경찰서는 이들이 태화관에 있는지 확인하는 전화를 했고 그렇다는 답변을 들은 뒤 이들을 체포했다.

5. 공약3장은 한용운이 썼다는 썰

독립선언서는 어렵고 고졸한 문체로 되어 있는데다가 온화한 투라 힘이 부족한데 공약 3장이 그나마 강경한 맛이 있는데, 이것은 공약 3장은 한용운이 써서 그런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초 독립선언서를 한용운이 쓰겠다고 했으나 최남선에게 맡기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이런 썰이 나오게 된 것이다.

6. 이완용에게 3.1 운동에 참여해달랬다고 했다는 썰

손병희의 전기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사실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완용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격렬하게 비난했는데(한 번도 아니고 몇 번에 걸쳐서 비난했다)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았다면 즉각 경찰에 신고했을 인물이다.

7. 종로 형사가 돈을 받고 독립선언서 인쇄를 눈 감아주었다는 썰

종로 고등계 형사 신철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보성사에 찾아왔는데, 손병희가 그에게 5천원을 주어 무마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여러 증언이 있고 매일신보 1919년 5월 22일 기사에도 나온다. 

신승희(신철의 다른 이름)는 이번 소요사건(3.1운동)이 돌발했을 당시에 천도교에서 5천원의 뇌물을 받고 음모를 계획하는 줄 알면서도 눈 감아 주었다. 그 일이 이번에 신승희 출장 중에 경성헌병분대에서 탐지되어, 남대문역에서 내리는 것을 체포했다더라.


그런데 일본 경찰의 신문기록은 좀 다르다. 신철이 천도교 간부를 포섭하려고 했는데 이에 천도교 측에서 역으로 그에게 150원의 뇌물을 주었고 이것이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철은 이 일로 일경의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150원의 뇌물로 사람을 죽을 때까지 고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손병희의 전기, 손병희의 아내 주옥경의 증언, 천도교 중앙총부 대종사장 정광조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독립선언서는 2만1천 장이 인쇄되어 전국 각지로 배포되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의 여러 사람들이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날랐다.

참고도서
박찬승, 1919, 다산초당, 2019
이문영, 우리가 오해한 한국사, 역사산책,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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