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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Oct 03. 2016

짜파게티 덕분에 쫓아낸 소매치기

운수 좋지 않은 날의 기억력




바스락

바스락



이틀 전부터는 배낭을 멜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난다. 삼 일 전에 파리의 아시안 마트를 들른 적이 있다. 그때 짜파게티를 여러 개 사서 배낭에 꾸역꾸역 집어넣은 덕분이다. 지극히 생존 본능에 의한 선택이었다. 파리에서의 여행이 끝나면 노르웨이 오슬로 국제 학생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는데 오슬로에는 짜파게티를 파는 곳이 없다. 게다가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내게 파리의 물가는 노르웨이보다 의외로 친절하다. 그러니 바스락바스락 가방이 짜파게티 포장지와 부딪치는 소리는 내겐 반가운 소리였다. 물론 짜파게티의 쓸모는 조금 더 빨리 발휘되긴 했기만 말이다. 


트루(Tours)에서 돌아온 밤, Trocadero 역에서 샤이오 궁으로 나가는 1번 출구로 걷던 중의 일이다. 파리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고 싶어서 샤이오 궁으로 가보기로 했다. 이미 파리에 와서 들러 본 곳이지만 마지막 날인 오늘엔 꼭 야경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늦은 밤의 Trocadero 지하철 역 출구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쉽게 무시하고 다시 걸었다. 곧 다시 기척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찝집하게 안심을 하고 다시 걸었다.


바스락바스락. 바스락바스락! 엇? 이건 짜파게티 소린데? 이번엔 진짜다. 뒤 쪽으로 재빨리 몸을 돌렸다. 곱슬 흑발의 붉은 옷이 눈에 확 띄는 10대 소녀가 내 배낭의 지퍼를 1/4 쯤 내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서투른 소매치기인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그녀는 빠르게 돌아 뛰어갔다. 더욱이 놀란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녀가 뛰자 양 옆에 벽 뒤에서 숨어있던 서너 명의 아이들이 함께 뛴다. 내 키보다 큰 남자아이들도 보인다. 다 같이 쏜 살 같이 뛴다. 그들은 저쪽으로 뛰고. 나도 가방을 부여잡고 반대쪽으로 빠르게 걷는다. 파리에서 말로만 듣던 10대 소매치기 그룹이었다.


다섯 명이라니. 다섯 명이나 내 가방을, 그러니까 나를 노리고 있었다니. 가슴이 뒤늦게 쿵쿵거렸다. 한눈에 보아도 고작 10대들이었다. 아이들은 슬금슬금 내 뒤로 다가와, 둔한 가방을 타깃으로 조금씩 조금씩 지퍼를 열고 있던 것이다. 일단 발걸음은 재빨리 에펠탑을 볼 수 있는 샤이오 궁으로 향했지만 가슴은 계속 뛰고 있었다. 다리도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소매치기 일당들은 악질은 아니었다는 생각은 든다. 그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지갑이나 훔쳐 가볼까 생각했으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짜파게티가 나를 살렸구나 싶은 순간이 분명했다. 짜파게티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내 가방은 투두둑 해체되어 꼴 보기 좋게 소지품을 도난당했을 것이다. 보통 배낭은 많은 짐이 담겨 있어 둔하기 때문에 다른 소지품을 잃어버리기 쉽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가방에서 가져갈 것이라곤 내 빨지 않은 옷들, 세안제가 전부였고 지갑은 내 청바지 안 주머니에 있었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그럼에도 에펠탑을 앞에 둔 가슴은 아직도 쿵쾅쿵쾅 뛰었다. 사방의 모두가 무섭게만 느껴졌다. 혹시 여기서 호스트 집을 찾아갈 때 또 소매치기가 있으면 어쩌지? 소매치기 일당의 실체는 내게 소매치기 이상의 위험 요소를 상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인 일정 때문에 오후 11시에나 나를 만날 수 있다던 오늘의 새로운 호스트, 샬롯에게 긴급 문자를 보냈다.



Some young people were trying to pick my backpack

and I don't know what to do right now. 

그러니까 내가 너희 집에 좀 일찍 가도 되겠니?


Oh no! 

Don't worry sweetie. You are my guest! 

Nobody can hurt my guest! 

I will be waiting for you until you arrive here!

내가 말한 그 역 앞에 맥도널드로 와. 친구들한테는 먼저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면 돼.

기다리고 있을게. 걱정 말고!!!



문자를 보는데 찔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슴이 그제야 공중에서 안전하게 착지하듯 차분해졌다. 파리를 여행하는 내내, 늦겨울 특유의 차가운 공기와 도시 전체의 청결하지 못한 인상, 어쩐지 무심해 보이는 파리 사람들의 얼굴 때문에 종종 위축이 될 때가 있었다. 소매치기에 대한 악명은 여기저기서 들어왔던 바, 괜히 혼자 걱정이 되어 사방의 그저 무심한 도시인들을 경계했던 것도 나다. 그런데 제대로 그 소문의 실체를 경험해 버린 것이다. 제대로 파리 여행을 해버렸다. 


그러니 그녀의 동네 근처의 맥도널드 앞에 서 있는 담배 피우는 샬롯을 봤을 때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랑스운 외모에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그녀는 사실 조금 정신없었다. 다음날 오전에 그녀의 부모님이 집에 온다며 청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부엌으로 가 설거지를 했다가, 집을 구경하는 나를 챙겨주느라 부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깨진 컵에 코코아를 따라 주며. "아 설거지를 못했어. 일단 마셔~ 문제는 없으니까."라고 컵을 내게 안기듯이 내밀고는 다시 부엌으로 사라졌다.


극진한 대접을 받고 온 터라 그녀의 색다른 환대(?)에 나는 조금 웃음이 났다. 안심이 됐다. 그녀가 나를 오랫동안 본 친구처럼 격의 없이 대해주었으니까. 그녀는 내가 있던 말던 자기 바쁜 일에 푹 빠져있었지만 그것은 내게 안락한 집에 돌아온 느낌을 주었다. 어떤 위험한 것도, 위해되는 것도 없이 평범하고 친근한 일상이 내 옆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곧이어 샬롯의 남자 친구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도 분명히 내가 오늘 카우치서핑을 하러 그들의 집에 방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벼운 포옹, 그리고 입가의 주름이 쏟아질듯한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는 그가 나도 어쩐지 첫눈에 낯설지가 않다. 흑발에 익살스러운 인상을 가진 그녀의 남자 친구는 오자마자 나를 냉장고로 잡아끌었다. 



"길 가다가 이런 사진을 주웠지 뭐야. 한국 애야? 일본 애야?"


"헐! 이건 한국에서 학교에 내는 증명사진이야. 이걸 어디서 났어?"


"왓? 우리 길거리에서 봤지. 재밌는 것 같아서 주웠어. ㅋㅋㅋ"



냉장고에 붙어있는 교복 입은 한국 소녀의 증명사진이 너무나 엉뚱했다. 우리로 따지자면 외국인 10대 소녀가 교복을 입고 찍은 증명사진 또는 여권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놓은 셈이었다. 누군가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다가 지갑에 있던 사진을 잃어버렸던 게 분명했다. 이런 사진을 도대체 왜 수집해 놓는 것인지 이 커플의 기괴한 흥미가 의심스러울 때쯤 냉동실에 있던 인스턴트 케이크를 내미는 그녀.



"내가 어제 먹던 거긴 한데, 되게 맛있어. ㅋㅋㅋ"

"좀 오래되긴 했어도 냉동실에 있었으니까 괜찮아."



뭐야. 얘네 너무 엉뚱하고 순수한 매력이 있는 애들이잖아. 이런 집에서 바로 한 시간 전쯤 만났던 소매치기 일당의 무서움은 떠올릴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금방 찾아드는 밤. 다음날 각자의 바쁜 일정으로 부산스러운 세 사람. 집에 별다른 이불이 없다며 각종 담요를 모아 침대를 만들어주었던 이들의 귀여운 친절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파리에 오기 전에, 누군가 파리는 생각보다 위험하고 더러운 나라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여행 첫날, 카우치서핑 호스트에게 바람을 맞고 비가 내리는 파리를 돌아다니며 여행해보니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였다. 


나는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는 동네 버스에서, 동양인 외국 여자 아이 한 명을 제 때 정류장에 내려주기 위해 버스를 멈추고 내 자리에 다가와 "This is the bus stop you should get off."라고 말해주던 콧수염이 짙은 버스 기사 아저씨를 기억한다.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한국 분이시냐는 뜬금없는 내 질문에 자신들이 머무는 민박집 주소를 흔쾌히 알려주던 한국인 여행자들도 기억한다. 


무엇보다 호스트에게 바람맞은 나를 위해 함께 화내 주고, 달달한 생일 파티 식사를 예약해주었던 니나 커플과, 오늘 나의 갑작스럽고 호들갑스러운 문자에 바쁜 와중에도 나를 마중 나와준 샬롯의 털털한 호의 또한 어떠한가.


다음날 아침,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홀로 집을 나섰다. 첫날 아침엔 어딘가 무뚝뚝하고 사나워 보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날 아침은 그들이 결코 경계되지 않았다. 하나같이 제 나름의 하루를 시작하느라 바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나와 다르지 않은 또 다른 일상의 주인공들로 느껴졌다. 






 





브런치북 소개


좋은 기억력이란 '기억하는 힘'이 아니라 '기억해낼 수 있는 힘'이다. 최대한 많은 과거를 또렷이 외우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이 딱히 생산적인 의미는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자신에게 힌트를 줄 수 있는 과거의 긍정적인 대화나 사랑받았던 시간들을 필요한 순간 떠올릴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늘과 내일의 더 나은 삶의 동기를 찾아내는 데 있다. 그게 진짜 기억력(力)이다.



모든 여행 후에, 모든 사랑 후에, 모든 이별 후에. 우리에게는 기억력이 생깁니다.
지금 당신을 구원하는 기억력은 어떤 말을 걸고 있나요?

20대라면 모두가 여행 중이거나 여행 후인 요즘. 훗날, 우리는 이 젊음을 어떤 시간으로 기억할까요? 바로 그 '훗날'의 입장에서 지난 여행을 소회해 보았습니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만 20살부터 10년 동안 경험한 노르웨이 1년 체류, 카우치서핑 (프랑스,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라트비아, 스웨덴) 은 물론 산티아고 도보 순례 및 리투아니아 워크 캠프 & 터키, 이태리에서의 엄마와 떠난 여행들이 건강한 30대로 성장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여행 후의 기억력>을 공유하겠습니다.





작가 소개 


글 쓰고 운동하는 브랜드 마케터. 

좋은 기억력과 좋은 일기장에 기대어, 과거형의 기억을 미래형의 문장으로 소환합니다.

@seheeb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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