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앨런 Aug 02. 2019

내가 만난 나쁜 의사

맹장터진이야기, 다섯 번째

맹장터진이야기, 네 번째 에서 계속..




Day 9: 월요일

큰 병원에 가보라니까. 아내의 조언에 일단 약을 받았으니깐 먹으면서 하루만 더 있어 보겠다고 대꾸하며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은 꼭 가볼게, 걱정하지 마. 월요일 아침마다 열리는 전사 회의를 마치고 회사 근처 내과를 찾았다. 그 와중에 제일 큰 곳을 가야겠다 싶어 검색해보니 몇 달 전 건강검진을 했던 곳의 이름이 나왔다. 내과 전문의 7명. 잘됐네, 여기 가야겠다.


띵! 5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순번표가 나오는 기계 앞에서 직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몇 시로 예약하셨어요? 아니, 저 건강검진이 아니라 진료받으러 왔는데요. 혹시 감기 걸리셨어요? 아뇨, 감기는 아니고 배가 아파서. 저희가 감기약 같은 간단한 처방은 끊어드리긴 하는데 다른 건 안 해요. 내과가 있다고 하던데. 건강검진만 해요. 아, 그렇군요. 아주 공장 같은 곳이군요. 뒷말은 삼키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시 폰을 꺼내 인근 내과를 검색하며 길을 건넜다. 우리 동네가 아니어서 그렇지 여기도 어차피 다 동네병원이니까 비슷비슷하겠지. 조금 멀더라도 다른 곳으로 갈까 잠깐 생각했지만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 네이버지도에 사진이 등록된 곳 중에 하나를 찍어 찾아갔다. 좁고 낡은 엘리베이터. 느낌이 싸했지만 일단 올라탔다. 좁고 낡은 복도. 느낌이 싸했지만 일단 병원 문을 열었다. 좁고 낡은 공간. 느낌이 싸했지만 일단 접수대로 갔다. 뽀글 파마에 이상한 프린트 티셔츠. 느낌이 싸했지만 일단 이름을 적었다. 간호사는 어디 있지?


네이버지도에 등록된 사진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햇빛이 비치지 않는 대기실에는 조명조차 어두워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푹 꺼진 소파에서 한참을 기다리자 접수대 옆, 쪽방 같은 곳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삐걱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환한 빛이 쏟아졌다. 여긴 무지 환하네. 어떻게 오셨어요. 의사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내게 물었다. 제가 지난주 일요일부터 배가 아파서. 엊그제? 아니, 지난주요. 그때부터 의사의 아웃사이더 랩이 시작됐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왕 재수 없게 증상을 묻는 의사. 만약 지난주에 같은 질문을 들어본 적 없다면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불행하게도 이미 들었던 내용인지라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여기 신발 벗고 올라가세요. 상의 올리고. 꾹. 꾹. 꾹. 으아악! 지난 일주일 내 배꼽을 본 의사는 당신이 세 번째인데 내 배를 이렇게 거칠게 다룬 건 당신밖에 없소. 소리 없는 아우성. 의사는 다시 모니터를 보면서 아웃사이더 랩을 이어갔다.


통증이 있다가 없다가 하죠? 흠, 지난주부터 꾸준히 아픈데요. 번뜩, 의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알이 없는 뿔테를 쓰고 마스크를 안경 밑까지 치켜올린 그의 눈은 기분 나쁘게 차가웠다. 그러니까 통증이 계속 똑같다는 말이에요? 따지듯이 묻는 그에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다 싶어 입을 뗐다. 똑바로 누우면 조금 더 아픈데 가만히 앉아있으면 조금 덜하고요, 움직이다 보면 조금 더 아플 때가 있어요. 아니, 그러니까 통증이 있다가 없다가 한 거네요.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긴 하죠. 다시 고개를 돌려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의사.


평소에 밀가루 많이 드시죠. 갑자기? 네, 빵을 좋아하긴 하는데. 배에 가스가 차서 아픈 겁니다. 평소에 소화는 문제없어요? 그는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중간중간 한심하다는 듯 내 얼굴을 힐끗대며. 뭐, 가끔 좀 더부룩하긴 한데. 단 거, 밀가루 이런 속에 안 좋은 거 많이 먹어서 배에 가스가 차서 아픈 거라고요. 일단 오늘 점심 먹지 말고 저녁이랑 내일 아침에 흰죽 먹고. 약 드릴 테니까 식사랑 상관없이 다섯 시간 간격으로 먹고.


기분이 더러웠지만 맞길 바랐다. 그래, 내가 빵을 좀 좋아하긴 하지. 이참에 건강한 식단으로 몸을 아껴보자.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약을 먹는 나에게 팀원들이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점심 먹지 말고 오늘 저녁이랑 내일 아침에는 흰죽 먹으래요. 근데 흰죽을 어디서 팔지. 편의점에 있나. 본죽에서도 흰죽 팔아요. 메뉴에는 없던데요. 그냥 말하면 줘요. 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여기 혹시 흰죽 파나요. 네, 6천원입니다. 영수증 필요하신가요? 아뇨, 혹시 두 개로 나눠주실 수 있나요. 입맛도 없는 데다 많이 먹어 좋은 건 없으니, 저녁에는 흰죽을 3천원어치만 먹었다. 뭔가 배가 덜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 그냥 재수가 없을 뿐 명의가 아닐까. 멀건 죽 위에 간장을 한 방울 떨어뜨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니었다. 맹장이 터진 내게, 빵을 먹지 말라고 말한 그는 여태껏 내가 만난 의사 중에 제일 불친절하고 기분 나쁜 의사였을 뿐이었다.






맹장터진이야기, 여섯 번째 에서 계속..

이전 04화 맹장아 미안해 (계속)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