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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런 Aug 01. 2019

죽 먹을 때가 아닌데

맹장터진이야기, 세 번째

맹장터진이야기, 두 번째 에서 계속..




Day 6: 금요일

비적비적 매가리 없이 빗길을 걸었다. 근래 최악의 컨디션으로 지하철 입성. 궁둥이부터 밀어붙이는 전사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욕 좀 해도 될까요? 몹시 예민한 몸 상태로 출근. *슬랙을 보니 다른 팀원들은 새벽까지 술을 마셨나 보다. 함께 마셨어도 누군가는 멀쩡하기 마련. 몇은 이미 바른 자세로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몇 시까지 드셨어요. 저희 노량진에서 두세 시 정도. 읭, 언제 노량진까지 갔어요. 그러게요.
*회사에서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 툴(aka사내메신져).


어제의 자신에게 진 빚이 많은 이들은 오전 반차를 썼다. 여긴 우산 말리는 자리 같네요. 시체가 되어 연락이 끊긴 한 명의 자리에는 우산 여럿이 펼쳐졌다. 다들 태연하게 일하고 있었지만 슬랙에서 순댓국 멤버를 구하자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나에겐 다른 의미의 해장이 필요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장을 그만 나의 육체에서 해방해주고 싶었다. 살그머니 꺼내서 깨끗이 씻고 다시 조심스레 넣어놓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장염이라 믿고 있었기에. 저는 죽 먹을게요. 그럼 제가 사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11시 35분에 나간 팀원들은 1시가 되어도 깜깜무소식이었다. 내 법카를 가져가 놓고 왜 오질 않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사 올걸. 사실 뭔가 먹고 싶은 맘이 티끌만큼도 없었기에 기다리는 시간이 고되진 않았다. 그저 다른 것도 아닌 죽을 사다 주기로 해놓고 이럴 일인가 조금 원망했을 뿐. 1시 35분. 마침내 내 평소 행실을 반성하게 될 때 즈음 순댓국쟁이들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당신에게 죽 딜리버리를 시켜서 제가 죄송하죠.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광고 카피처럼 나는 죽이 되어 축 늘어진 채 천천히 숟가락질했다. 불어버린 여섯가지야채죽은 나의 장기들을 괴롭히러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갔다. 오늘도 죽 드세요? 병원 가요. 이미 두 군데나 다녀왔죠. 안색이 되게 안 좋아요. 그것은 다행이군요, 속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꾀병처럼 보이진 않겠군. 조퇴메이크업을 하는 심정에 급공감.


불금을 향해 내달리는 발걸음에 섞여 퇴근. 저녁 먹었어? 아니, 하지만 생각이 없어. 카레 있는데. 좋아. 냄비 옆에 서서 한 그릇 뚝딱. 혹시, 카레 다 먹어도 돼? 당연하지, 자기. 속은 괜찮아? 으응. 냄비에 있을 땐 적어 보였는데 그릇에 담으니 카레가 제법 많군. 맛있게 쓱싹.


이제 와 생각하니 맹장한테 너무 미안하지만. 그렇게 금요일이 저물었다.






맹장터진이야기, 네 번째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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