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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런 Jul 31. 2019

맹장이 터졌다 (어이쿠)

맹장터진이야기, 첫 번째




맹장이 터졌다.


누구든 주변에 한 명씩은 있지 않은가? 맹장 수술받은 가족,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 별로 새로울 리 없는 이야기지만, 새롭다. 내 맹장이 터진 건 처음이니까.




Day 1: 일요일

처음 복통을 느낀 건 지난 일요일 오후. 아내가 만들어준 파스타를 폭풍흡입하고 (시원한 하이네켄도 함께.. 캬!!) 아이가 남긴 파스타까지 싹 해치운 다음 여느 때처럼 낮잠을 잤다. 뭔가 불편함을 느꼈지만 티 내면 나중에 밥을 조금 줄까 봐 일단 모른 척. (소화제 한 알 먹고 오침.)

저녁이 되자 불편함은 통증으로 자라났다. 더는 외면할 수 없어서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조금 체한 것 같은데, 손 따는 거 어디 있더라? 늘 손을 따면 즉시 효과가 있었던 터라 몹시 기대했지만 열 손가락을 다 따도 별로 나아지질 않았다.

하루 지나면 나아지겠지, 뭐..



Day 2: 월요일

이상하다. 왜 배가 계속 아프지? 성가신 통증을 데리고 출근. 점심은 죽을 먹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약속이 있었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팀원과의 만남. 생각해보니 오랫동안 함께 일했지만 단둘이 식사를 한 적은 없었다. 여러모로 약속을 취소하긴 싫었고, 11시 40분쯤 로비에서 그를 만났다.


앗, 언제 오셨어요. 조금 걸어야 하긴 하는데 여기로 쭈-욱 내려가면 맛있는 우동집이 있어요. 몇 번 가봤는데 되게 괜찮아요. 어떻게, 잘 지내시죠? 안부토크, 근황토크. 두 명이요. 저는 올 때마다 이 메뉴만 먹었는데 같이 나오는 가라아게도 팅팅하고 맛있더라고요. 주문할게요. 여기 이거 두 개 주세요. 여기 12시에만 와도 막 줄 서서 먹더라고요. 음식을 기다리며 회사토크. 음식이 나온 후 회사토크. 사무실로 돌아가며 커리어토크.


맛있는 점심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후, 소화제 한 알을 챙겨 먹고 오후 근무.




Day 3: 화요일

이틀이 지나도 배가 아픈 것은 좋지 않다. 평소와 달리 아랫배가 (똥배 말고) 아픈 것도 맘에 걸려 출근길에 집 근처 내과를 찾았다. 처음 오셨어요? 여기 성함이랑 좀 적어주세요. 주민등록번호 다 써야 하나요? 네, 다 적어주세요. 주소는 동까지만 적으셔도 돼요.


안녕하세요. 제가 엊그제부터 배가 아파서. 블라블라. 그러시군요. 여기 신발 벗고 한 번 올라가 보세요. 똑바로 누우시고요. 상의 좀 올려주세요. 배 좀 만져볼게요. 여긴 괜찮으세요? 여기. 여기. 여기. 으앜! 됐습니다. 내려오세요. 위치로는 맹장인데 증세는 가벼운 장염인 것 같거든요. 일단 약을 3일 치 드릴 텐데 계속 아프면 내일이라도 다시 오세요.


아이고 맹장이면 어쩌지. 너무 귀찮다. 그냥 장염이길. 점심은 죽. 저녁도 죽. 약도 잘 챙겨 먹고. 퇴근 후 골골대는 모습이 밉상일까 아무렇지 않은 척했는데 배가 계속 아팠다. 여느 때처럼 내 배 위에서 팡팡 뛰려는 4세 건강 남아에게 빌었다. 엌, 아니아니, 오늘은 안 되겠어.


육퇴 후 넷플릭스. 근데 장염이 아니면 아이스크림 먹어도 되는 거 아냐? 신속하고 정신 나간 합리화를 거쳐 맛있는 아이스크림콘을 하나 먹었다. 뭐야, 윗부분이 맛있는데! 잠깐 한눈판 사이에 시나몬이 잔뜩 뿌려진 아이스크림 상단을 뿌셔버린 아내에게 눈을 흘기며.




Day 4: 수요일

새벽은 길었다. 아내가 잠들고 엑박을 조금 하다가 거실로 나왔는데 갑자기 복통이 밀려왔다. 바로 누우면 더 아프길래 엎드린 채로 기절과 기상의 반복.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아잌, 깜짝이야. 물 마시러 나온 아내는 정체불명의 생물체가 거실에 퍼져있어서 혼비백산. 출근 전에 침대에 잠깐이라도 누우려고 방으로 기어들어갔다.


아침이 밝았다. 다른 병원에 가봐. 아내의 말대로 다른 내과를 찾았다. 어제 갔던 병원에서 150m 정도 떨어져 있는 곳. 30분 일찍 진료를 시작하는 곳. 부지런한 만큼 더 용하지 않을까. 자기 이름을 붙인 병원은 실력에 더 자신이 있는 걸까. 쓸데없는 추론을 하며 낡은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세상에 병원 안은 더 낡았다. 동네 어르신들이 벌써 소파에 앉아 손주를 보듯 나를 올려다보셨다. 여기 이름 적고 조금 기다려주세요. 저 처음 왔는데. 아, 그럼 여기에다가 이름이랑 다 적어주세요. 하이고 더워라, 나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 머리 뒤에서 날아오는 할머니의 호통 아닌 호통에 흠칫 놀란 후, 소파에 앉았다. 다른 병원에 갈까.


안녕하세요. 제가 일요일부터 배가 아파서. 블라블라. 예, 혈압부터 좀 잴게요. 푸쉭푸쉭. 수동으로 혈압을 재는 건 참 오랜만인 듯. 의사 선생님은 낡은 스트랩과 내 팔 사이에 청진기를 밀어 넣고 시계를 보신다. 예, 저기 올라가서 누워보세요. 처음부터 여기가 아팠어요? 내려오세요. 피검사 좀 하고 다시 볼게요.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왼팔로 해도 되나요? 소매를 걷어 올린 나에게 간호사님은 그런 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손끝에서 뽑을 거예요. 약간 따끔해요. 따끔. 오른손 중지 끝에서 핏방울이 솟아올라 작은 관으로 들어갔다. 아폴로같이 생겼네. 밖에 나가서 잠깐만 기다리실게요.


예, 앉으세요. 아픈 위치는 맹장이 있는 자린데 단순 장염인 것 같네요. 혹시나 해서 피검사를 한 건데 염증 수치가 안 높아요. 맹장염이면 염증 수치가 엄청 높거든요. 그리고 일요일부터 아팠다고 했는데 맹장이면 이렇게 사흘까지 안 오고 벌써 터졌어요. 일단 약 처방해드릴 테니깐 계속 아프면 다시 오세요. 죽 드시고요.


괜찮아요? 팀원들이 안부를 물었다. 자리는 맹장이라는데 장염 같데요. 맹장이라고요? 아니, 아픈 자리는 맹장이 있는 곳인데 장염 같데요. 피검사도 했는데 염증 수치가 안 높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맹장이었으면 진즉 터졌을 거라고. 그럼 점심 뭐 드세요? 죽이요. 순댓국 먹으실 분? 저요 저요. 아, 부럽다.


하필 저녁에는 한 달 전에 잡힌 풋살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하필 회사 사람들끼리 하는 게 아니라 다른 회사랑 하는 경기였고, 하필 경기장은 집과 회사에서 겁-나 먼 곳이었다. 하필 집이 나보다 더 먼 팀원이 불참 의사를 먼저 밝혔고, 하필 나의 복통은 새벽보다 많이 가라앉았다. 오늘 풋살 뛰세요? 아, 뭐 그냥 가서 서 있죠 뭐.


정말 모두 사이좋게 늦은 탓에 실제 공찰 시간은 한 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금씩 교체하면서 뛰니까 평소보다 운동량이 적었다. 이상하게 땀은 비 오듯이 쏟아졌지만 날씨가 습한가 보다 했다. 끝나고 시원하게 한 잔? 저 장염이래요. 장염엔 소맥이죠. 운동 후 맥주의 맛을 느껴본 지 너무 오래인지라 저항하지 못한 나는 인근 중국집으로 향했다.


사장님 일단 군만두랑요. 군만두는 지금 안돼, 다 떨어졌어. 덕분에 우리는 군만두를 제외한 모든 메뉴를 시켰다. 통만두, 물만두, 오리알, 오향장육, 고기튀김, 쇠고기튀김. 소맥소맥소맥. 캬! 오늘 왜 이렇게 잘 들어가지? 소맥소맥소맥. 회사 얘기에 이어 베트남, 동남아, 핀테크, 리브라, 페이스북, 트럼프, 비트코인 등등 우리들의 토크 티키타카.


지하철은 당연히 끊겼고 다들 뒤늦게 한탄했다. 엨, 택시비가 4만원이 나와! 늘 집이 멀어 울상이었던 팀원 두 명의 표정이 이날만큼은 밝았다. 저희는 여기서 되게 가까워요. 다들 조심히 가세요.


무섭게 서울을 가로지르는 택시 안에서 35분간 멍 때리다가 집에 도착. 씻고 기절.







맹장터진이야기, 두 번째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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