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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런 Jul 31. 2019

내겐 너무 잔혹한 회식

맹장터진이야기, 두 번째

맹장터진이야기, 첫 번째 에서 계속..




Day 5: 목요일

입에서 지난밤의 향기가 비릿하게 풍겼지만 생각보다 숙취는 심하지 않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배가 아픈지도 모르고 푹 자고, 정신없이 출근했다. 굿모닝. 어제 풋살 잘하셨어요? 네네. 괜찮아요? 어제보단 조금 나은 것 같아요. 아픈 주제에 풋살을 한다고 일찍 퇴근한 것을 감추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진짜 통증이 조금 줄어든 느낌이었다. 이제 조금씩 나아지는 건가. 진짜 장염이었나 보네. 그럼, 점심 뭐 먹지?


순댓국이 간절했지만 어제의 폭주를 만회하고자 죽을 선택했다. 본죽이 언제부터 이렇게 비싸진 거야. 점심 버짓 8천원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는 하나뿐. 여섯가지야채죽 하나 주세요. 네, 야채죽 하나요. 포장이세요? 아, 그냥 야채죽이라고 불러도 되는구나. 다음부턴 그렇게 주문해야지. 점심시간이긴 하지만 매장 안은 지나치게 붐볐다. 주문한 죽이 나올 때까지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인파 속에서 나는 부유하는 스티로폼처럼 이리저리 떠밀렸다. 야채죽 하나 포장하신 분이요!


광란까진 아니어도 꽤 신나는 밤을 보낸 내가 맥없이 야채죽을 떠먹는 것을 보고 나와 함께 달렸던 누군가가 다가왔다. 괜찮아요? 네, 하하.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약 먹고 있으니까 나아지겠죠. 잠시 후, 어젯밤의 또 다른 동지 한 명이 불콰한 얼굴로 나타났다. 나 회사법카랑 결혼반지를 청바지에 넣어놨는데 읎어졌엉, 어떡해. 경기장에도 전화해봤는데 없데. 아내 몰래 하나 사야지 뭐. 기성품이라서 다행이다. 서글프고 쿨한 그의 넋두리에 난 울상을 지으며 웃어 버렸다.


하필 목요일은 두 달여 만의 팀 회식이자, 나와 제일 오래 일을 함께한 팀원과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점심에 죽을 먹었으니 괜찮겠지. 몹시 이상하게도 저녁이 다가올수록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 몸이 오슬오슬 떨리기도 한 것 같은데 사무실이 무진장 추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다들 나가시죠. 지금 못 나가는 사람? 어, 밖에 비오네. 모두 죄송하지만 저는 이만! 외치고 집에 가고 싶었지만, 마음의 소리는 마음에 묻고 비를 맞으며 택시에 올라탔다.


1차 장소는 압구정에 있는 가담. 나도 가담 되게 좋아하는데 1년에 한 삼십 번은 가는 듯. 근데 왜 전 회식에 초대 안 해줘요? 회사를 나서기 전에 다른 팀원이 건넨 섭섭한 농담이 떠올랐다. 거기 가면 난자완스 꼭 드셔보세요. 근데 다른 것도 다 맛있어요. 다음에 따로 한 번 같이 가시죠. 좋아요. 그럼 이만.


사실이었다. 난자완스 뿐만 아니라 누룽지랑 같이 나오는 탕수육, 해삼 안에 탱글탱글 새우를 채운 금사오룡까지 모두 맛있었다. 문제는 배가 점점 아프고 몸에 기운이 없다는 것뿐. 많이 드세요. 권하는 말에 거절하지 않고, 몸과 입이 분리된 것처럼 맛을 즐겼다. 연태가 몹시 땡겼지만 그건 도저히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쓴 술이었나. 그동안 내가 먹은 것과 다른 액체인가.


2차는 강서면옥. 마감이 40분 남은 시간에 도착하여 부리나케 요리를 주문하고 다들 정신없이 술을 따랐다. 난 이미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지만, 냉정하게 냉면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면도 한 젓가락. 흠, 역시 내 입맛엔 필동이 제일이야. 여전히 몸 상태를 배려하지 않은 주둥이가 음식을 계속 흡입했다. 파무침과 함께 수육도 한 점. 그래 이건 맛없기도 어렵지. 다른 이들의 빈 잔을 꾸역꾸역 채워주며 사이다잔으로 열심히 짠을 쳤다.


3차는 계곡. 입구에는 ORGASM VALLY라고 적힌 네온이 붉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여기 이상한데 아니에요. 알쏭달쏭한 말을 하며 자신의 마지막 회식을 자축하는 팀원이 무리를 이끌었다. 슬라이딩 도어를 밀치고 우리는 조금 안쪽 단체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나의 혼은 이미 그곳에 있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의 흥을 깨기 싫어 남루한 육체를 소파에 기댔다. 주문하러 갔던 팀원이 돌아왔다. 일단 헨드릭스 하나 시켰어요. 오늘만 사는 사람인가? 아, 당신은 내일이 마지막이니까 그럴 자격이 있군요.


이대로라면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기절하면 술 때문이라 착각할지도 몰라. 위험하다. 저, 죄송하지만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면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지하철을 탔다. 집에 오는 길이 세상 멀었다. 허우적거리며 집에 도착하여 사경을 헤매다, 결국 새벽에 가담의 요리들을 토해냈다.






맹장터진이야기, 세 번째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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