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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Feb 26. 2018

우주 왕먼지 예찬 - 베를린 벼룩 시장에서

각양각색 우주 왕먼지들의 커뮤니티





우리는 대단하지 않다
그래서 자유롭다





몇 해 전 한 페스티벌에는 "나는 우주 왕먼지다"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수많은 학생들이 그 앞에서 인증샷을 남겼고 박원순 서울 시장은 이 문구를 인용해 대한민국 청춘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이 극단적인 비유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이란 물론 자조감이다. 경쟁 사회에서 나가 떨어진 무력함과 속 빈 강정같은 청춘이란 타이틀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진 영혼들은 스스로를 먼지라 불렀다. 오래동안 청소하지 않아 옷장 위에 쌓인 먼지로는 부족했다. 아직 그 규모조차 밝혀지지 않은 무한 우주에 대비된 지극히 작고 무력한 먼지 정도는 되어야했다.


그러나 이 문구에서는 기묘한 희망같은 것도 느껴졌다. 땅굴을 팔 때까지 파고 나면 솟는 뜻밖의 자존감같은 것. 적어도 우주를 떠다니는 '초미세먼지'가 아니라 '왕먼지'아닌가. 내가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인정할 때, 우리에겐 이상한 객기가 생긴다. 우주 왕먼지가 한 번 쯤 실패한다고 해서 우주에는 큰 일이 생기지 않는다. 우주 왕먼지가 예상치 못한 시도를 한다고 해서 지나가던 외계인이 잔소리 할리 없다. 우리는 대단하지 않다. 그래서 자유롭다. 그리고 뭉치게 될 것이다.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거대한 존재가 아니기에, 먼지들은 힘을 합해 커뮤니티를 만들고 교류하고 태양의 빛을 함께 쬐는 법을 강구할 것이다. 오만과 편견을 버리고 무력하고 작은 서로를 돕기 시작할 것이다.



베를린의 장벽공원(Mauer Park) 벼룩시장은 바야흐로 각양각색의 우주 왕먼지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다. 영원히 청춘에 머무를 수많은 베를리너들과 이방인들이 서로 다른 왕먼지로서의 매력을 발휘하며 커다란 퍼즐을 완성하는 곳. 베를린에 갓 정착한 난민부터(독일어도 아직 익히지 못한) 가진 건 엘피판뿐인 가난한 할아버지까지.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인정한 자유로운 먼지들이 모여 서로의 역사와 이야기를 거래하는 곳이다.


벼룩시장에 들어선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금발의 어린 여자 한 명이 나를 불러 세웠다. 양팔 넓이도 안되는 작은 테이블이 그녀에게 할당된 공간의 전부였다. 그녀는 그 위에 엉성하게 만들어진 백팩 두개를 세워놓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돌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괜찮으면 내 이야기 좀 들어볼래?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러다 얼마 전에 친오빠랑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떠 올랐어."하면서 그녀는 그녀의 발명품에 대한 이야기를 핵폭탄급으로 쏟아부었다. 어찌나 큰 소리로 명확하게 말을 하는지 금새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정작 그녀가 준비해온 상품은 단 2개. 그녀는 당당하게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 온라인 사이트가 적힌 명함을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린 여자의 패기에 감탄하며 질문을 던졌다. "이 사이트에 가면 살 수 있는거야?" 돌아온 대답은 상당히 도발적이었다. "아니, 그 사이트 들어와서 우리를 위해 펀딩을 해주면 우리가 이걸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을거야"


아이디어는 있지만 돈은 없는 왕먼지들. 용케 브랜드라는 것을 완성했지만 수줍음 많은 왕먼지들이 이 곳을 박람회 삼아 모인다. 그들에게 이곳은 팝업스토어이자 홍보관이며 매주 일요일마다 오는 소중한 기자회견장이다. 이상한 물건을 맘껏 내놓아도 되고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도 되는 곳이기에 이 벼룩시장은 유럽 최고 규모를 자랑한다. 우리 나라에도 벼룩시장 문화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각종 협동 조합과 대기업들의 개입 없는 온전한 벼룩시장은 아직 찾아 보기 힘들다. 물론 동묘앞 시장같은 만물시장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 마저도 저소득층 노인들의 커뮤니티로 인식되어지고 있으니.

 




가난해서가,
작고 무력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기에 이 곳에 모인다




한 아저씨는 체스에 꽂혀 평생을 살았고 어떤 할아버지는 평생 엘피판을 모았다. 전쟁을 피해 겨우 베를린에 온 아주머니는 운 좋게도 아주 귀여운 아기 옷을 만들 줄 아는 금손을 타고났다. 한 부부는 한국어 책부터 아랍 책까지 수중에 없는 책이 없다. 체스도 엘피판도 아기 옷도 책도 별거 아닌 것들이다. 그것들은 세상의 진보를 이끄는 과학기술이 아니며 이들의 주인들이란 덥수룩한 수염과 얼룩 가득한 앞치마를 입은 괴짜들이다. 하지만 이 우주 왕먼지들은 서로의 일요일을 진보시키고 나아가 일상을 변화시킨다. 뜻밖의 물건들을 만나고 그 물건을 넘어 이야기를 만난다. 그 누구도 자신의 취향과 수집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작고 작은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들은 사회의 시선과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왕먼지들이 모여 사회의 거대한 기준을 누그러뜨리는 거다.


벼룩이 튈만큼 골동품이 모인다는 어원에서 시작한 '벼룩시장'은 원래 가난한 저소득층만을 위한 시장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베를린 벼룩시장에서 각양각색의 왕먼지들은 스스로의 정의를 다시 써가고 있다. 특별하고 재미있는 왕먼지들의 커뮤니티. 가난해서가, 작고 무력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기에 이 곳에 모인다. 그래서 이곳에는 그 어느 기술 박람회나 미술 전시회 못지 않게 매주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서로의 일요일을 변화시키는 일, 그것만으로 우리 왕먼지들의 업적은 아름답지 않은가.


나도 이곳에서 1970년대 히피 할아버지가 입으셨을 커다란 점퍼를 샀다. 그 시절의 베를린의 히피는 오늘날 서울의 힙스터로 부활할것이다. 과거 베를린의 왕먼지와 현재 서울의 왕먼지의 아름다운 거래였다.



2018. 02. 21.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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