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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Feb 02. 2017

교토의 겨울 빛을 찍다

일본의 숲


일본에 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일본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은 온 몸을 다해 일본다움을 고백한다는 것을. 친구들과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도 신사에 들려 기도하는 젊은이가 그러하고. 레이스가 봉긋 봉긋 솟아있는 양말을 뽐내며 혼자 앉아 라멘 주문서를 작성하는 소녀가 그렇다.


하물며 빛도 공기도 마찬가지. 특히 겨울의 공기는 남다르다. 푸름이 감도는 후지필름의 고유 필터가 여기서 영감을 얻은 걸까 싶을만큼 겨울의 일본빛은 특이한 푸르름을 가졌다. 새벽에 나타났던 푸르름이 사라질 때를 놓치고 오후가 되어서도 거리를 헤매이고 있는 느낌이랄까. 어쩐지 가엾고 처연하며 음침하기까지한 푸르름이다. 하지만 난 길 잃은 푸르름에게 길을 알려줄 생각이 없다. 가엾고 처연한 여자가 일으키는 신비로운 매력과 더 들어보고 싶은 사연처럼 이 애처로운 푸르름은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을만큼 매력적이다.


카메라에 담으면 곧잘 사라져버리는 빛을 어떻게 포착할지 몰라 애꿎은 셔터만 계속 눌러댔다. 필름카메라였다면 꾀에 넘어가 필름만 도둑당한 꼴이었겠지만 새삼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에 태어난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그렇게 해서 겨우 빛을 찾은 곳은 교토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후시미이나리 신사에서 였다.


후시미이나리 신사의 상징인 홍색 문의 기둥들은 푸르른 나무들과 보색을 이룬다
숲의 단면은 액자 속에 갇힌 그림이되고, 나뭇잎의 결은 누군가의 거친 붓터치같다
숲의 단면은 액자 속에 갇힌 그림이되고, 나뭇잎의 결은 누군가의 거친 붓터치같다
어두운 숲의 그림자와 푸르른 공기가 나뭇잎을 청록색으로 물들인다


겨울의 후시미이나리를 찾는 사람들은 순백의 눈 위에 펼쳐진 다홍색 길을 꿈꾸고 온다고 한다. 일본의 국기처럼 흰 천위에 물들인 다홍색 빛처럼 날이 서있는 애절함을 기대한다. 하지만 내 차례에 눈은 없었다. 대신 푸르른 녹위에 보색 대비로 다홍색 길이 펼쳐졌다. 지난 1300년 동안 이나리의 단풍 나무 숲길은 일본인들의 순례길로 쓰였다고 한다. 이 나무들이 뿜어내는 시퍼런 기운은 순백의 눈 부럽지 않게 강렬하고 드라마틱했다.


붉은 토리이 길 위에서는 아무도 숲을 보지 않는다. 붉은 기둥에 기대어 사진을 찍거나 빼어난 원근감 한 가운데에 서 보일 뿐이다. 모두가 앞뒤의 길을 바라볼 때 나는 숲으로 시선을 옮겨봤다. 붉은 기둥과 기둥을 액자 삼아 초록색 풍경을 담아본다. 아, 푸른 공기는 역시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푸른 공기는 숲을 만나니 한 층 더 음산해진다. 한 여름 날 진초록이었을 나뭇잎이 겨울의 빛을 만나 청록색으로 변했다. 검푸른 색은 겨울의 추위에 풀이 죽은 숲의 얼굴같다. 너무 너무 춥지만 산을 지켜야하는 나무의 운명처럼 애달프다.


초록 숲 사이사이, 홍색 기둥들
일본의 숲 향기를 맡으며 붉은 길을 걸어오르면 영화 <게이샤의 추억> 속 장쯔이가 된 기분이다


전통옷을 차려입은 커플이 찾아왔다
"내 목선 보고 있는거야?"라고 여자가 묻는 일본의 술광고가 생각난다


한 때는 마냥 부러워했던 일본 젊은이들의 문화가 있다. 바로 전통 의상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일이다.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도 이제 한복을 입고 나들이가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는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멋진 문화를 만든 것이 대견하기만 하다.


후시미이나리 신사에도 기모노를 입은 친구들이 많았다. 한 손에는 작은 주머니 가방을 들고 한 손에는 셀카봉을 쥐고서는 악착같은 종종걸음으로 산길을 오른다. 그 중에 한 커플이 있었는데 남자는 열심히 여자를 찍어주고 있었고 여자는 붉은 기둥들 사이에 가장 아름다운 기둥이 되어 섰다.


은각사의 정원은 잘 손이 많이 간듯 자연 그대로인듯 그마저도 중도를 지켰다
일본인은 이끼도 애정을 가지고 기른다
잔디가 아닌 이끼가 만드는 언덕은 밀도있고 부드럽다
숲의 시작은 작은 이끼들이 만드는 푸른 언덕부터

두번째 푸른 빛은 은각사에서 찍었다. 사찰의 건물보다 정원으로 유명한 은각사는 그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을만큼 가치가 각별하다. 일본은 이끼를 정원의 소재로 잘 활용하기로 유명한데, 이끼는 개끗한 습기를 먹고 자라 공기가 깨끗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지표로 활용되기도 한다. 우리 나라처럼 미세먼지가 없는 깨끗한 겨울 공기를 먹고 자란 이끼는 겨울 공기의 검푸른 빛을 닮았다.


이끼는 벨벳처럼 정원의 언덕과 바위를 고르게 덮고 있다. 정원 전체를 흙빛이 아니라 초록빛으로 가득하게 하는 건 모두 이끼의 덕이다. 이끼는 잔디보다 더 밀도있고 부드러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카메라, FUJI X-100T

촬영 일자, 2017. 0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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