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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Mar 05. 2018

리멤버 미- 리멤버 미-

베를린 벼룩시장에서 죽음을 생각하다




정리하지 못하고 떠난
수많은 사람들의 과거가
길가에 내 앉아 있었다





주말 오후였으려나. 할머니는 한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꽤 지난 후였다. 할머니의 통곡 소리로 이어지던 밤이 다시 일상의 리듬을 막 찾았을 즈음이었다.


할머니 뭐하세요?


대답이 없는 할머니 무릎 위로는 오래된 앨범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벌컥 열린 장롱 앞에 놓인 할머니의 작은 몸은 두꺼운 앨범들로 둘러 쌓여 있었다. 할머니는 6개 정도의 앨범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는데 한 장 한 장 꺼내진 사진들은 어떤 기준에 의해 두 가지로 분류되는 중이었다. 할머니 왼쪽 무릎 아래엔 몇 장 안되는 사진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고 오른쪽 무릎 아래엔 수많은 사진들이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아마도 왼쪽 무릎 아래가 높은 경쟁률을 뚫고 통과한 승리자들의 장소인듯했다. 그 기준이 뭔진 몰라도 말이다.


엄마, 할머니 뭐하는 거야?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한숨을 섞어 긴 말을 쏟아냈다.


너희 할머니가 보통 분이시니. 여행가시면 한 달 전부터 짐을 싸시는 분이야. 당신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까 생전에 당신 사진을 정리하시는 거야. 돌아가시면 어차피 모두 불에 태워질테니까. 꼭 남기고 싶은 사진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리시려는 거야. 사진 많이 남겨봤자 자식들한테 짐만 된다고.


학생이었던 나에겐 그 말이 꽤 서늘하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든 의문은 나의 죽음을 내가 준비해 간다는 것이 가능한가였다. 죽음이라는 그 무서운 미지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데 이성적으로 준비한다니 그게 가능한가? 게다가 사진을 버린다고? 나의 세월과 나의 사람들과 나의 기억을 유형화 시킨 가장 근사한 것을 내 손으로 버려야한다니. 미니멀리즘이고 나발이고, 추억이라하면 애틋하게 쌓아두고 소장하는 것만이 익숙했던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그 하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얼마나 많은 결심을 해야했을까. 그 날 열심히 자신의 기억을 솎아내는 할머니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어도 여지껏 선명하다. '남길만한 기억'과 '남기지 않아도 될 기억'을 솎아내는 기준을 그 나이가 되면 갖출 수 있는 건가.



베를린 마우어 파크 벼룩시장(Berlin Mauer Park)의 한 코너에는 버려진 사진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우리 할머니처럼 사진을 채 정리하지 못하고 떠난 수많은 사람들의 과거가 길가에 내 앉아 있었다. 이 사진들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꽤 최근 찍은 가족 사진들은 낱장으로 굴러다녔다. 외국인의 얼굴을 인테리어 삼는 동양 여행객들과 유럽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그 사진들의 주 고객이었다. 그 시대에 혹은 그 가문에게 꽤나 중요한 인물이었을 한 군인은 액자에 단단한 보호를 받으며 근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경우, 사진보다는 액자로 가격이 측정되었다. 그 단단한 액자를 사는 사람에게 근엄한 미소는 공짜 덤과 같은 거였다. 구매한 사람이 집에가서 근엄한 미소를 잔뜩 구겨 휴지통에 넣어버리든지 말든지.



이건 아무래도 유태인들 같지?
그러네. 유태인 엄마와 딸들인 것 같다.


유럽과는 인연이 꽤 많았던 탓에, 혹은 어릴 때부터 히틀러의 역사는 누누히 배워왔던 탓에, 우리는 유태인의 얼굴 쯤은 구분할 수 있었다. 늠름한 독일 장군의 액자 바로 옆에는 활짝 웃고 있는 유태인 가족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에 아버지는 없었다. 아버지에겐 무슨일이 생겼을까. 이 사진을 찍고 이 세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죽었을까. 죽기 살기로 도망친 집에 홀연히 남겨진 액자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이곳에 나왔을지 모른다. 이렇게 사진 한 장은 수많은 이야기를 속삭인다. 머나먼 한국에서 온 나에게 자신들에게도 인생이 있었다고,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다고 어쩌면 아주 처절하게 호소한다. 벼룩시장은 그렇게 소리없는 절규로 가득차올랐다.



길가에 내려 앉는 것은 사진 뿐만은 아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썼을 안경 더미 사이로 쓸만한 안경을 찾아 헤맨다. 그것도 아주 어린 소녀가 말이다. 추억은 어쩌면 대물림된다. 제법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이 지구에서 안간힘을 써 버틸만큼 버티는 거다. 증조할머니에서 할머니로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내려왔을 아주 오래된 접시도 결국 이가 빠지고 금이 가서 길거리에 내 앉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접시를 내가 서울로 가져왔다. 어머니는 왜 이렇게 남이 쓰던 걸 사왔냐고 하신다. 그럼에도 찬찬히 보시더니, 나름의 멋이 있다고 기뻐하신다. 국경을 넘은 추억의 대물림이다.






우리의 추억마저 길가에 내 앉을 그 언젠가가
우리 모두에게 마땅히 찾아올 것이다





애니메이션 <코코>가 떠올랐다. 영화에서는 이승에 있는 사람들 중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저승에서 고인은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살아지는 일이 진짜 죽음이라는 의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내게 아주 클리셰인 위로를 건냈었다.


너의 마음 속에 할아버지가 있는 한 할아버지는 영원히 살아계신거야.


하지만 때론 클리셰만한 것이 없다. 그 말이 그만큼 전 세계에서 남발되는 이유는 그것이 나름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당신들의 어머니들 사진을 보여주신 적이 있다. 한복을 입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 무표정으로 굳어있던 오래 전 그 분들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코코의 저승세계에 그 분들은 아직 살아계시려나. 내가 아직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벼룩시장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낯선 얼굴들도 저승세계에서의 수명을 조금은 연장했을지 모른다. 내가 한 참을 바라봐주었으니 말이다.


오래 전 유럽의 혹독한 겨울을 나고 봄을 맞았을 때 적었던 구절이 있다. 이 형편없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단 한가지 평등한 기쁨이 있다면 봄이라는 계절일 거라고. 모두에게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는 이 짜릿한 기쁨만은 길거리에 있는 노숙자에게도 테라스에 앉아있는 부자에게도 모두 공평하지 않겠냐고. 나이가 들수록 더 공평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걸 말이다. <코코>가 보여주듯 죽음이란 잊혀짐이다. 스마트폰을 처음 만들어낸 스티브잡스와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나폴레옹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두 잊혀지고 만다. 우리의 추억마저 길가에 내 앉을 그 언젠가가 모두에게 마땅히 찾아올 것이다.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을 것이다.


오늘 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목소리를 더듬어 볼 것이다. 그들의 얼마안되는 사진을 찾아 장롱을 뒤지는 것보다 눈을 감고 차분히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FujiX100t / Canon 5D mark3

2018. 0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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