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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Mar 20. 2018

독일맘과의 티타임

지구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




나의 이민 위시 리스트 1위 국가에
빨간 줄이 쳐지는 순간이었다





눈이 떠지지 않았다. 폭설 때문에 20시간 만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다음 날이었다. 6년만에 만난 라트비아 친구 우나(Una)를 재회한 기쁨이 없었다면 난 아마 공항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곧 우나의 독일 친구인 호가르 집으로 향했다. 아프리카 풍 그림과 아시아 여행 서적, 붓다상으로 꾸며진 호가르의 거실은 집주인의 취향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흠, 낯설지 않군.



호가르는 매트리스에 바람을 불어 넣고 폭신한 손님용 이불을 덮어주었다. 20시간 이상 성층권과 공항을 배회하던 나에게 이런 대우는 황송하리만큼 따뜻했다. 그러나 반전은 새벽에 찾아왔다. 호가르는 겨울에도 난방을 틀지 않는 특이한 체질과 고집의 소유자였다. 손님용 이불은 깨끗했으나 불행히도 두껍지는 않았다. 거대한 케리어를 뒤져 후드티를 꺼내 입었다. 새벽 4시였다. 그 후로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아침이 왔다. 어느 순간 매트리스가 심하게 흔들려 잠에서 깼다.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친 우나가 그 기다란 다리로 매트리스를 밀어대고 있었다.  


정말 날 데려갈 생각이야? 나 너무 피곤한데.  


우나는 오전에 예전 회사 동료인 나우엘(Naoual)의 집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나우엘은 약 한 달 전 쯤 아기를 낳았다. 우나는 곱게 포장한 아기옷을 손에 들고 발로는 계속 매트리스를 흔들어 대며 말했다.


당연히 너도 같이 가야지.


솔직히 이해가 안갔다. 왜 내가 본인의 친구를 보러 같이 가야한단 말인가. 유럽애들이 이렇게 집단주의 적이었던가. 당연히 내 의사를 존중해 줄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나는 겨우 어제 밤에 여기 도착했다고! 속으로는 불만을 가득 쏟아내면서도 나는 빠르게 옷을 입고 있었다. 지극히 한국인답게 말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나우엘의 집에 걸어가는 길에 나는 나우엘이 아시아 여성을 만나본 적 있는지 확인해야했다. 갓 태어난 아기 앞에서 엄마들은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해 질 것이었다. 동양에서 온 낯선 이방인을 그녀가 꺼려할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우엘 집의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안도할 수 있었다. 당연히 백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우엘은 갈색 피부의 여인이었다. 퉁퉁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끼고 질끈 올려 묶은 머리가 인상적인 갈색 여인. 이 갈색 여인이 인도에서 왔는지 아프리카에서 왔는지 혹은 그냥 피부만 갈색인 프랑스인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아주 다양한 문화를 지나치게 많이 경험하며 살아왔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직접 만든 파운드 케잌과 차를 마련해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모로코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 동안 프랑스에서 살다가 4년 전 독일로 왔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독일 사람이었는데 몹시 수줍은 성격처럼 보였다. 입만 뻐끔거리며 소리없는 인사를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내가 회사에서 어중간한 지인과 마주쳤을 때 인사하는 방식 그대로였다. 반면 지나치게 활발한 나우엘은 우나와 그동안 못나눈 수다를 쏟아냈다. 우나와 나우엘이 같은 회사를 다닐 때, 단짝 동료였다고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는데 그 둘 빼고 나머지는 모두 못된 놈(Jerk)들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첫날 밤 나를 재워준 호가르도 못된 놈 중 하나였는데 호가르는 자기도 모르게 인종차별 적인 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날 나우엘이 평소 본인의 성격대로 거침 없이 자기 주장을 펼치자, 맞은 편에 앉아있던 독일 남자 호가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보통 너네 나라 여자들은 얌전한데, 넌 참 다르단 말이지.


나우엘은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게 열 불이 뻗칠 때마다 그녀 곁엔 함께 욕해주는 우나가 있었다.  

독일 애들은 그런 인종 차별 교육 잘 받아서 그런 애들 없는 줄 알았는데. 흠. 나는 평소 독일을 우러러보았다. 자신의 역사를 반성하는 역사관과 그 역사관을 유지시키는 교육시스템, 이민자에 대한 개방성과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살아남은 경제력까지. 독일을 지구에서 가장 괜찮은 나라라고 주장하기 위해 나는 수많은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나우엘이 말했다.


3년 전 쯤만 해도 인종차별같은 보수적인 생각들은 노인들만 했는데 이제는 아니야.너도 알다시피 유럽 전체가 보수적으로 바뀌고 있고 이민자에 대해 젊은 세대들도 안 좋게 생각하기 시작했어. 아주 못된 것들이 많아지고 있지.


이런, 나의 이민 위시 리스트 1위 국가에 빨간 줄이 쳐지는 순간이었다. 나우엘은 파운드 케잌 큰 조각을 입에 넣고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나우엘은 유모차를 끌고 혼자 집에 오고 있었다고 했다. 천천히 길을 건너는데 빠른 속도로 차가 와서는 나우엘을 향해 크랙션을 울렸다. 나우엘이 길을 다 건너서 반대편 보도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크랙션은 한 동안 멈추지 않았다. 뒤 돌아보니 운전자는 나우엘을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나우엘은 말했다. 만약 자신이 백인이었다면 이런 취급을 받지 않았을거라고.


독일 젊은이들의 인종차별 이야기가 한 창일 때, 나우엘의 남편이 등장했다. 우나는 귓속말로 나우엘의 남편은 '착한 독일인'이라고 말해줬다. 어색해 보이는 나우엘 남편에게 나는 뻔한 질문을 던졌다.


아기 키우는 건 어때? 힘들지?
우린 어제도 2시간밖에 못잤어.

 




독일은 어린이집이 3시면 문을 닫아
우리는 어쩌라는 거지?



뿡. 나우엘 남편과의 대화가 시작되려는데 야니스 (아기 이름)가 방귀를 뀌었다. 갑자기 방구를 뀌는 야니스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야니스의 방귀 냄새를 연막 삼아 나는 줄곧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조심스레 흘려보냈다.


 그래도 독일은 엄마들이 살기 좋지 않아? 육아 휴직도 엄청 길 것 같은데.
육아 휴직이야 당연히 몇 개월 주는 편이지. 그럼 뭐해? 복직한 후가 문제야. 독일은 어린이집이 3시면 문을 닫아. 그럼 우리는 어쩌라는 거지? 3시에 퇴근해서 아이들을 찾으러 가라고? 결국에는 아이를 가지면 그만둬야하나 고민하는 여자들이 생기는 거지. 사회가 여자들이 일을 못하게 조장하고 있어.  


나우엘이 한 숨에 대답을 이어갔다. 맙소사. 내가 독일에서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물론 내가 독일이란 나라에 막연한 환상을 가진 탓도 있었다. 최근 북유럽 부모들의 행복한 삶이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유럽 전역이 저렇게 살고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진 것도 내 탓이었다. 재밌는 건 독일의 건강한 노동환경이 오히려 엄마에게는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베를린의 유명한 카페에 들렸을 때, 문을 닫아야해서 나가 달라던 사장님이 생각났다. 불과 오후 2시 50분이었다. 실례가 안된다면 이렇게 이른 시간에 가게를 닫으시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냐고 말을 걸었다. 혹시 다른 직업이 있으시냐고 사장님께 물었다. 파란색 체크 남방을 입은 소탈한 중년의 사장님은 말했었다.


Yes I do. That’s family job! (다른 일이 있고 말고요. 가족 일이요!)


사장님은 3시가 되기 전 가게 문을 닫고 3시엔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는 것이었다. 우리가 ‘저녁이 있는 삶’을 궁리할 때 이들은 이미 ‘오후가 있는 삶’을 살고 있구나. 그 때 나는 또 한 번 독일이라는 나라에 점수를 줬었다. 그러나 어린이 집 노동자들이 ‘오후가 있는 삶’을 보장받는 동안 나우엘같은 워킹맘들은 육아로 고통받고 있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한 나였다. 얼마 전 한국에서 본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나는 고도의 심층 면접을 이어갔다.


북유럽에서는 그래서 엄마들이 파트타임 잡을 하는 경우가 많다던데. 독일은 그렇진 않아? 우리는 정규직만 대우받기 때문에 사실 상 그런게 불가능하거든.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맡기는 경우가 많아.


야니스를 보며 사랑스러운 표정을 짔던 나우엘이 고개를 돌려 격분하며 대답했다.



그건 북유럽이지. 우리도 파트타임 잡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그런 일은 대부분 지급이 낮은 경우가 많고. 만약 내가 부자 남편과 결혼했다면 나도 파트타임 잡을 하거나 집에서 애를 봤을거야. 오 정말 그러고 싶군. 너도 부자 독일 남자를 만나서 결혼해. 독일에 이민도 오고 일도 안할 수 있지 않겠어?


한국 회사 카페테리아에서 차장급 여성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중인가. 지금 내가 어디있는지 다소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다. 이제 결혼을 한 친구들과 육아 공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의 토론은 늘 막다른 벽에 부딪혔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하는지가 문제였다. 사회의 육아 복지 시스템과 회사의 노동 환경이 서로를 탓하는 사이에서 친정엄마와 시엄마의 새우등만 터지고 있는 중이니. 독일도 어째뜬 일하는 엄마로 살기는 힘들다는 게 현실이었다. 독일 친구에게 부자 독일 남자 만나서 팔자 피라는 말을 들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참 웃긴 건 알 수 없는 내 마음이었다. '아 한국만 살기 힘든 건 아니구나'하는 간사하고 얄팍한 안도감이 마음 한 쪽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엄마로 '잘' 살아가기란 이 지구상 어디에서도 아직 해결 중인 과제란 생각에 든 유대감이기도 했다.



올 해 서른이 된 나는 얼마 전 처음으로 이모가 되었다. 유치원 때부터 친구가 아기를 낳았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서 난생 처음 본 신생아는 예상보다도 더 작았다. 우리집 강아지보다도 작은 것이 꿈틀대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야니스처럼 방구도 뀌었다. 육아는 지옥이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던 탓에 나는 덩달아 긴장 상태였다. 독일도 애엄마로 살기 어렵다는 나우엘의 말이 '엄마'라는 거대한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 한국 여성들에게 위로가 될지 절망이 될진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한 건 그 타이틀이 위대하다는 사실이다. 이 지구상에서 인종차별과 미세먼지와 교육환경과 노동환경같은 거대담론들의 공격을 가뿐히 즈려밟고 '엄마'의 길을 걸어가는 여성들.


지구가 돌고 돌아 '엄마'로 살기 힘든 한국은 밤이 될 때 '엄마'로 살기 좋은 북유럽은 낮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엄마들의 지구는 돌지 않는다. 한국의 엄마도 북유럽의 엄마도 밤낮을 잊은 채, 아기 곁을 지킬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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