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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권 May 27. 2022

더러운 아이, 못된 아이, 못생긴 아이

아이. 비가역적이고도 연약한 우주

더러운 아이, 못된 아이, 못생긴 아이

아이. 그 비가역적이고 연약한 우주

 

 삶을 관통하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였던 첫째가 태어났을 때는, 과연 내가 이런 사랑을 또다시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셋째가 태어났을 때 그런 의구심은 어느샌가 의미 없는 것이 됐다. 모두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앞선 경험은 이어지는 경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인식이라는 면에서, 이렇게 만나는  사랑은 죽음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밀물처럼 다가오던 슬픔의 와중에서 나는 놀라고 있었다. 실제로 목격한 죽음이 그간 내가 읽고, 보고, 상상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간 읽고 보았던 죽음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모두 부질없는 헛것이었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직접 목격하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것에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뿐이다. 그저 우리가 느끼고 감동하는, 하지만 정확히 특정 지을 수 없는 이 물밀듯 한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듯이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사랑도 죽음처럼 충격적이었다. 첫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내 아이가 있는 삶이란 것이 정말로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고, 둘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셋째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건 첫째가, 둘째가, 셋째가 없었으면 알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삶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으니, 존재할 수도 없는 삶.


 세상 모든 아이들은 그 아이와 관련된 사람에게 하나의 우주를 열어준다.  그런데 그 우주는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만큼만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때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역동하고 있는 본모습은 무엇인지 알 도리는 없다. 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 그 우주의 일면이라도 이해하게 되는 데는 때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더러운 아이


 내가 초등학교 시절은 어렸을 때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으로 알았던 박정희가 죽고 잠시 찾아온 민주주의를 만끽할 새도 없이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독재자가 집권했을 때였다. 헛된 약속과 절망, 비열한 부역자들의 궤변이 지면을 채웠고 사람들의 불만과 물안은 곳곳에서 머리를 디밀었다. 폭력은 그 불안과 불만이 만들어내는 빈틈을 차곡히 채우고 있었다.

 초등학교 앞에서 전경에게 맞은 대학생들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도망가는 것을 본 것도 그때였다.

 비가 내리면 학교 화단에는 달팽이들이 풀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아이들은 달팽이를 잡아서 놀았다. 우리는 무딘 연필을 깎기 위해 작은 면도칼을 갖고 다녔는데 어떤 아이들은 달팽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눈을 잘라버린 후 다시 돌려놓곤 했다.  

 폭력은 어디에서나 일상적이었고, 그건 이제 갓 유치원을 나와 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많이 맞았고, 때렸으며, 부모의 재산이나 시험성적, 운동 결과로 줄을 서고 평가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것들은 모두 다 연관되어 있었다.


 내가 나온 학교는 소위 명문대학의 부속초등학교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그곳에 보내고 싶어했다.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많았고, 우리는 서로의 집안을 알고 있었다. 누구는 국무총리의 손녀고, 누구는 티브이에 자주 나오는 재벌집의 아이라는 걸, 그리고 그 재벌이 몰락했을 때도 우린 다 알고 있었다. 자가용이 드문 시절이었는데 학교 주요 행사 때는 자가용들이 줄 을지어 정문 앞에 대기하곤 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 집도 그렇지 않은 집 중 하나였다.

 우리는 어렸지만 많은 것을 알았다. 담임선생님이 엄마들을 모아놓고, 내가 대학을 다니는 아이가 있다고 하면서 수금을 했다는 사실도 다들 알고 있었다. 당시 촌지는, 폭력처럼 만연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다 불편했지만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그 학교에는 양무리 속의 검은 양처럼 눈에 띄는 애들도 있었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오던 아이들. 머리도 잘 감지 않는 것 같았던 아이들. 그중에 유난히 타깃이 되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의 놀이 중 하나는 그 아이를 놀리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얼마나 더러운지 얼마나 냄새가 나는지 하는 것은 주된 놀림거리였다.  누군가는 그 애가 코를 파더니 길게 나온 코딱지를 책상 위에 뿌려버렸다는 이야기를 한 일도 있다. 그게 사실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 말은 곧 아이들 사이에 돌았고 아무도 그 아이 옆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나는 초등학교 동창들의 이름들이 가물가물 하지만, 그 여자애 이름은 기억이 난다.

 오랜 세월이 지나, 아이 러브 스쿨 같은 사이트가 유행하면서 동창모임이 활성화되었을 때도 그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동창들 중 누구도 그 아이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한 번은 낡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학교로 찾아온 일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 아이의 아버지라고 수군거렸다. 작고 마른 그 아저씨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다. 아이의 아버지가 된 입장에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버지의 슬픔을 짐작하는 것조차 힘들다.



못된 아이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학교에는 심각하게 엇나가는 애들이 있었다.

 우리는 영어 시간에 영어를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칠판 앞으로 불려 나와서 문제를 못 풀면 맞았는데 그 아이는 이름이 불리면 무조건 맞았다. 놀랍게도 국어책을 읽다가도 맞는 일이 있었다.

 그 학교에는 정원이 있는 성북동 고급 주택가에서 자가용 기사가 모는 차로 통학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공원으로 개발되기 전 낙산에 있었던 빈민 아파트에서 다니는 애들도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돈을 뺏기거나 두들겨 맞으니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부모님께서는 신신당부를 했지만, 그 아이와 같이 가면 낙산 위에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 아이는 담배를 폈고, 나쁜 형들과 어울려 다녔으며 문이 열린 집에서 신발을 훔쳐 애들에게 팔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싸움을 잘한다거나 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당시 우리들은 거의 매일 누군가 싸움을 하고, 그걸 구경 가곤 했는데 그 아이가 싸우는 것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 아이는 결국 학교를 그만뒀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정학을 받아던 것도 같다.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마지막 중학교 소풍 때였다. 나라에서 소풍을 가라고 하니까 보낸다 하는 느낌이 강했던 썰렁한 소풍이었다. 왜 여길 왔는지도 모를 조선시대 왕의 무덤에 버스를 타고 도착한 우리들은, 몇 시간 주어진 자유시간 동안 주위를 돌아다니고 1회용 사진기 같은 것으로 사진을 찍었다. 가끔 어울리곤 했던 거친 친구들과 함께 뒷산을 올라갔을 때 그때 그 아이가 있었다. 다른 버스를 타고 소풍에 따라온 것이다.

 누군가 굴러다니던 맥주병을 들고 병을 안전하게 깨서 무기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며 바위 모서리에 내리쳤을 때 그 아이 눈에 비쳤던 두려움을 기억한다.

그 아이는 말이 없었고 뛰어노는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그만둔, 또는 쫓겨난 학교의 소풍에 따라온 그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까지는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렸다.


못생긴 아이


 못생긴 아이들은 항상 놀림거리였다. 특히 못생긴 여자애들을 더더욱 그랬다.

내가 초등학교시절 살았던 동네 친구들 중에는 남매가 하나 있었는데, 동생뻘인 남자애와 나와 동갑인 여자애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둘 다 참 못생겼었고 우린 그걸 자주 놀렸다. 어린 남자애는 그러려니 하곤 했지만 큰 여자애는 놀리는 애를 때린 기억도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애에는 내게 편지를 하나 줬다. 평소와는 달리 뭔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걸 들고 집에 가고 있는데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가 다가와서 그게 뭐냐고 물었다.

 나는 친구가 보는 앞에서 그 편지를 읽지도 않고 버려버렸다. 못생긴 여자애와 엮인다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 놀림감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고 난 그게 더 두려웠던 것 같다.

 우리는 못생긴 여자애들을 게임 내의 NPC 같은 존재로 여겼던 것 같다. 우리가 플레이하는 게임에서 동료나 심지어 몬스터조차 아닌, 그저 게임 내에 존재하고, 가끔 우리와 별 의미 없는 인터랙션을 할 뿐인 존재 같은 게 아닐까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  


 첫째가 태어나서 몇 년이 지난 후였다.

퇴근을 하면 나는 손을 벌리고 안아달라고 하는 아이를 껴안고는 뽀뽀를 하고 번쩍 들어 안아 고개를 아이 목덜미에 파묻고 냄새를 맡곤 했다. 체온과, 촉감과 후각과 내 모든 것으로 아이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내 심박이 차분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주말에 티브이 다큐멘터리를 볼 때였다.

선천성질환을 갖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는데 이제 막 네 살 정도나 됐을까? 우리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선천적 안면기형인 여자아이가 나와 이런 말을 했다.


“XX 이는 안 예뻐요. 저 꽃들도 예쁘고 나비들도 예쁜데 XX 이는 안 예뻐요.”


 나는 그 대사를 잊을 수 없다.

 그때였다. 끊임없이 눈물이 나기 시작한 것은

나는 저 얼굴이 일그러진 아이가 우리 아이와 똑같이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그토록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내 아이를 경험하기 전에는 세상 모든 아이들이 다 저렇게 예쁘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들의 평가를 결정짓는 것들은 사실 그 아이들이 갖고 있는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 유년기, 내가 보고 경험했던,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깨달음은 이렇게 천천히 찾아왔다.

 상처에는 새 살이 돋지만, 흉터를 남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은 비가역적이며 다시 되돌릴 수가 없다. 우리는 찰나의 인생을 단 한번 살뿐이다.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남을 존중하는 마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과 타인을 존중하는 것은 같은 행동의 다른 면이다.

 불행히도 나는 그것을 깨닫는데 참 오래 걸렸다. 아직 깨닫지 못하는 면도 많을 것이다. 그저 남은 삶 동안 그런 실수를 줄일 수 있기를, 그리고 내가 저지른 잘못들을 내 아이들은 적게 저지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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