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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Jul 09. 2024

움직임의 예술: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것

내가 만났던 요가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 인사


요가, 춤, 퍼포먼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몸을 움직이며 이루어진다는 것, 특정한 시공간에있는 누군가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 그리고 그 움직임에는 어떤 내용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일종의 예술이라고 본다면, 모두 공통적으로 몸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고백하자면, 이들에 오랜 매혹을 느껴왔다. 매혹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은 이 장르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한 가지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곳에서는 사람으로부터 예술을 분리할 수 없다.“



춤은 추는 사람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댄서(dancer)를 제외시키고 댄스(dance)만을 추출할 수 없다. 예술로서의 춤은 오로지 예술가로서의 댄서의 수행으로서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퍼포머의 몸이 없으면 퍼포먼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몸 그 자체가 작품은 아니지만 몸과 분리된 작품은 없다. 다른 어떤 장르나 분야와 달리 움직임의 예술은 몸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몸을 통해 전파된다.  


 



*


예술적인 몸짓이 그 몸짓을 수행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세상에 드러난다는 점은 여러 의미를 파생시킨다. 먼저, 같은 움직임도 각 개개인의 몸에서 각기 다르게 번역되고, 재연되고, 재해석된다는 점이다. 어떤 단일하고 이상적인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서로 다른 시행이 있다. 특정 시공간에서 전개되는 이 움직임들은 하나하나가 구체적이고 고유하다. 움직이는 사람의 내면, 외면, 동작에 대한 이해, 지금 이 곳에서의 감각이 모두 그 움직임에 접혀져 있다. 그리하여 모든 춤은 서로 다른 것이 되고, 오늘의 퍼포먼스와 내일의 퍼포먼스는 같지 않다.  


몸짓의 예술 중 요가로 화제를 구체화해보자면, 요가 수행자 각각의 요가는 다르다. 요가를 접할 때, 우리는 요가 일반이 아니라 특정 사람에 의해 해석되고 현실화되는 특정한 요가를 보는 것이다. 내가 요가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것도 한 수행자의 신체가 보여준 그만의 요가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폴Paul 이라는 한 선생님, 요가와 함께 한 삶을 살아온 그의 신체에, 그가 해석하고 재연하는 요가에 나는 직관적으로 설득되었고, 그 일련의 기억 이미지들이 나를 줄곧 요가로 이끌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화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아래 링크 참고)  


 https://brunch.co.kr/@yoon607/131


 



**


몸짓은 오로지 몸을 통해서만 실현되고 보여진다는 점은 두 번째 의미로 이어지는데, 이는 움직임은 몸에서 몸으로 전파된다는 것이다. 동작은 개념이나 텍스트보다도 우선적으로 시각적, 촉각적, 언어적 접촉 속에서 이전된다. 한 몸의 움직임을 다른 몸으로 이전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 움직이고, 몸짓을 교정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몸이 살아온 움직임의 세계가 다른 몸으로 전달되는 방식은 각별하며 내밀하고, 각각의 연결이 하나의 단자로서 유일하다. 나는 요가의 총체가 아니라 이 선생님의 요가, 저 선생님의 요가를 통해 지금 이곳, 이 관계에서 나에게 다가온 특정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배우는 것이다.  


사바아사나[1]에서 내 발끝을 잡아 위아래로 풀어주며 이완 방법을 알려주었던 선생님, 지금도 몸을 쉬어야 할 때면 나의 발을 감싸 안은 그 맨손을 떠올리며 두 발을, 시선을, 입꼬리를 툭 늘어뜨리곤 한다. 혹은 허리에, 손끝에, 미묘하게 손을 대며 치료사처럼 금새 내 자세를 교정해주는 그 정밀한 손짓들. 바카아사나[2] 하는 법을 알려드릴 거에요, 보통은 바로 이렇게 팔에 올라타는데 그렇게 하면 어깨가 경직되고 힘이 잘못 들어갈 수 있어요. 일단 우선 오늘 한대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고, 등판에 힘을 채운 다음, 팔을 몸통쪽으로 굽히고 겨드랑이로 올라탑니다, 그러쵸, 그러쵸, 거기서 이제 한쪽 다리를 들고, 네에-, 자신이 습득한 방법, 그 고유의 표현들로 해석되고 전달되는 동작들.  


그 접촉의 시간에서 공유된 것은 비단 요가만은 아니었다. 목소리의 울림 속에서 함께 호흡하고 움직일 때, 서로 동작의 리듬을 맞추기도 각자의 속도대로 흘러가기도 하면서, 기운, 에너지, 역동, 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우리의 신체를 통과하고 우리의 신체에서 발산된다. 보이지 않고 규정할 수 없는 그 힘들 속에서, 밀도 있는 접촉의 시간에서 나는 조금씩 다르게 변화한다.  


[1] 사바아사나 Savasana 송장자세



[2] 바카아사나 Bakasana 두루미자세




***  




마지막으로, 몸짓의 수행은 시간을 거스르는 하나의 방법이다. 내 몸을 과거의 맥락으로 이동시키는 한 방법이라고 할까. 움직임들에는 그것이 이루어졌던 시대와 사회의 삶의 방식, 세계관, 믿음 체계가 담겨있다. 그러니 특정한 시대와 사회에서 비롯된 몸짓을 흉내내는 것은 내 자신을 과거의 움직임 속에 신체적으로 삽입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존재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을 겹쳐 보는 것이다.  


요가 수행을 할 때면, 일련의 몸짓들이 고대 인도에서부터 지금의 나에게로 도달하고 내 몸에서 새롭게 생성된다. 동작들이 가능케했던 진동과 약동이 내 몸을 통해서 다시 현실화된다. 역사, 철학, 믿음, 신화를 담고 있는 이 몸짓들은 나에게 익숙한 다른 움직임들과는 다르다. 시공간을 가로질러 나는 이 몸짓들로 가고, 역사가 현재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파열시키는지를 몸소 실험한다.  


예컨대 목과 목구멍을 수축해 숨을 가늘고 길게 쉬는 우짜이 호흡법은 나를 현재의 내 신체에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어떻게 나를 차분하고 균형잡히게 하는가?  태양신 수리야를 경배하는 수리야 나마쓰까라는 자연의 힘, 빛, 새로운 하루, 양의 기운을 어떻게 감각하고 이에 감사하게 하는가? 신체적인 부분 뿐 아니라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부분까지도 나는 다른 관점들을 품어보기 시작한다. 불교와 힌두교의 순환적 시간관, 예컨대 윤회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전 생에 나는 개미였고 다음 생에는 포도 덩굴이 된다면? 윤회의 고리를 끊고 영적인 승화로서의 죽음에 이르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된다면? 다른 관점을 관념적으로 흉내내보며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어떻게 바꾸어 낼지 상상하는 것도 꽤나 흥미롭다. 몸의 예술을 수행하면서 다른 시간을 살아낸다. 나는 과거를 번역하고 재해석하여 생생하게 살려내고, 그렇게 몸짓 속에서 서로 다른 시간은 교차하며 한 존재를 만들어낸다.  




****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구체적인 몸 없이, 몸짓은 없다.

일련의 움직임을 배워 나가며 다른 몸과 연결되고 지금 여기를 다른 시공간과 겹쳐 본다.

신체와 시간이 이루는 신비한 연금술, 그것이 요가이고, 춤이고, 퍼포먼스이고… 몸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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