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솜숨씀 May 05. 2019

여행의 예측불허에 대처하는 법

오키나와 초여름의 짜릿한 맛

5월의 여행지로 오키나와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비행시간이 비교적 짧은 휴양지여야 한다는 조건에 아주 적합했기 때문이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 렌터카를 이용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우리에겐 8년 무사고 경력의 베스트 드라이버가 있지 않냐며 큰소리쳤다. “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라는 누군가의 말에 다들 조용하고도 신속하게 여행자 보험에 가입했다.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인간의 감각 기능이 월등해진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런 종류의 월등함이라면 되도록 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와 친구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오키나와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는 국제거리로 향했다. 각자 준비한 쇼핑 리스트에는 사고 싶은 물건들이 빼곡했고 오늘 밤에 마실 맥주와 안주거리에 설레어 하며 한껏 들떠 있었다.


몇 분 후 나는 차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 차선으로 끼어들던 우리 차가 갑자기 앞차를 쾅! 하고 들이받는 장면이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자동차 부속품 몇 개가 양 옆으로 아주 느리게 날아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너무 놀라면 소리도 나오지 않는 법인가 보다.


우리 차가 앞차를 들이받고 앞차는 그 앞차를 들이받은 삼중추돌 사고.

차는 박살이 났지만 다친 사람은 없었다. ‘역시 뭐든 내구성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패닉에 빠졌다.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이곳은 일본이잖아!


앞차 운전자가 내리고 그 앞차의 운전자도 내려 자신의 차를 살펴보는 와중에 나를 포함한 총 다섯 명이 타고 있던 우리 차에서는 누구 하나 선뜻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떡해?”

운전대를 잡았던 친구가 울먹거리며 겨우겨우 차에서 내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우리들도 정신을 다 잡고 움직여야 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친구가 재빨리 내려 일본인 운전자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기요, 스미마셍. 으아, 어떡하지. 저기, 저기요. 스미마셍.”


친구는 더듬더듬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사과하면서도 운전대를 잡았던 친구에게 연신 괜찮다고, 안심하라며 어깨를 도닥였다.


또 다른 친구는 렌터카 업체에 전화를 걸어 말도 안 되는 영어로 다급히 상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마이 카 히트 더 카(My car hit the car)!”


아마도 나의 차가 다른 차를 쳤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편에서 잘 알아듣지 못했는지 친구는 빨개진 얼굴로 “아니, 그게 아니라, 마이 카가 다른 카를 히트했다고요! 마이 카! 히트! 더 카!”를 애타게 외쳤다. 한국어와 영어와 일본어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아무 언어 대잔치가 열렸다.


일본인 운전자는 차분하게 다가와 우리에게 괜찮냐, 다친 데는 없냐며 묻더니 “칸코쿠진 데쓰까?(한국인이십니까?)”라고 말을 건넸다. “예스, 칸코쿠진데쓰”와 같은 영어와 일본어가 섞인 이상한 대답을 하니 그가 친구 핸드폰을 건네 받아 렌터카 업체와 통화하며 상황 정리를 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 두 명이 출동해 주변의 부서진 차량 조각들을 치우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렌터카 업체는 차가 좀 막혀 우리가 있는 곳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오키나와의 가장 번화한 거리 한가운데에 경찰 두 명의 보호를 받으며 여자애들 다섯 명이 쪼르르 서 있는 풍경이라니. 온 시선이 집중됐다. 거기다 앞 범퍼가 찌그러진 차까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근심 어린 얼굴로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지난주 출근길에는 초만원이었던 지하철 안에서 한 남자가 온몸이 경직된 채 눈을 뜨고 기절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빳빳해진 남자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괜찮으시냐고 묻는 목소리만 지하철 안에 웅웅 맴돌았다 (이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다. 그 남자가 제발 무사히 일어났길 바란다.)


이뿐만이 아니다. 손님도 별로 없는 한적한 버스 안에서 회사원처럼 보이는 여성 옆에 바짝 붙어 성추행을 하던 겁대가리 상실한 아저씨를 향해 “아저씨! 뭐하시는 거예요? 설마 성추행하는 거 아니죠!”라고 큰 소리로 망신을 주던 여고생도 있었다. 낯짝 두꺼운 아저씨는 황급히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정말 고마워요.” “에이, 뭘요.”와 같은 대화가 오가더니 며칠 뒤 버스 정류장 앞 분식집에서 두 사람이 떡볶이를 먹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여고생이 물을 마시다 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껄껄껄 숨이 넘어가도록 웃기도 했다. (씩씩하기까지 하다니! 너무 좋아!)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침착하게 타인을 돕는 다정한 사람들을 본다.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사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들. 나는 그들을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부족하지 않지만 넘치지도 않게. 전력을 다한다는 건 그런 거 아닐까? 불가능한 일을 기어이 해내겠다며 바득바득 힘쓰기보다 딱 무리하지 않는 선까지만 정성을 들이는 것. 그리고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를 잃지 않고도 전력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좋은 나를 잃지 않아야 좋은 남을 잃지 않는다.


오키나와 여행 첫날 본인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을 텐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안심시키며 일본인에게 사과를 하던 친구, 말도 안 되는 영어를 써가며 상황을 해결하려던 친구, 대중교통에서 낯선 사람에게 “괜찮으세요?”라며 묻고 걱정하는 이들을 전력을 다해 닮고 싶다. 기꺼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얼마나 멋진지 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우리를 싣고 갈 견인차가 도착했다. 차를 타고 가는 길, 다들 긴장이 풀려 아무 말이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도로 끝에 걸쳐진 하늘에선 해가 지고 있었다. 빨갛게 물든 오키나와의 저녁놀을 보고 있자니 배시시 웃음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아, 여행의 짜릿함이란 게 바로 이런 걸까.



이전 06화 천 원에 일주일짜리 희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