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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Feb 04. 2019

옥상에서 만나요

간밤에 꿈을 꾸었다. 김소영 당인리 책발전소 사장님(전직 아나운서)과 함께 교복 기증 행사에 참가하는 내용이었다. 행사에 참가할 때 입으려고 백화점 매장을 들쑤시며 예쁜 원피스를 찾아다녔지만 맘에 드는 치마가 없었다. 울상을 짓고 있는 내게 소영 언니가 어깨를 툭툭 치면서 무심하게 말하며 지나갔다. “넌 치마보다 슬렉스가 잘 어울리더라.”


그렇게 나는 “저기요, 여기 슬렉스 없나요?!”라고 옷가게 직원에게 외치며 꿈에서 깨어났다.




우리나라 최대 명절인 설 연휴가 시작된 날 아침, 옷장 속에 잠들어 있는 까만색 슬렉스들을 떠올리며 나는 쫓기듯 집에서 나왔다. 너는 시집 언제 갈래, 연봉은 얼마 받니처럼 예의 없이 선을 넘는 질문 세례와 잔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집 근처 스타벅스로 피신해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며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었다. 이미 한 차례 조언과 오지랖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잔소리들을 한껏 듣고 나와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는데 단편 <효진>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몇몇 문장들이 주는 위로가 큰 힘이 되었다.


태어난 곳으로부터, 소속된 모든 집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관계로부터 도망쳐왔어.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아. 남보다 못한 가족들과도 어떻게든 인연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처음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해내고, 지옥 같은 회사를 개선시키고, 성격이 안 맞는 애인과 다투고 다퉈서는 안정적인 관계에 다다르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해. _ <효진> 중에서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적으면서 생각했다.

‘이 책을 마저 다 읽은 다음에는, 카페 문을 씩씩하게 열고 나가서, 단 것을 사먹고, 집에 가야지!’




2016년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이 일어난 뒤 나 또한 10번 출구를 갔었다. 노란색 포스트잇에 적혀 있던 저마다의 소리들을 읽으며 울었다. 이후 데이트 폭력, 밤 늦게 탄 택시에서 마주한 위협과 공포, 위계 질서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 등 많은 여성들이 목청 높여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여성 혐오를 드러내며 꽃뱀이라 비난하는 목소리도 생겨났다.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요즘 여자들 무서워서 살겠냐”, “모든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야”, “나는 안 그래”와 같은 말을 직장 상사에게, 직장 동료에게, 아버지에게, 남동생에게, 연인에게 들을 때마다 온몸의 숨구멍들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논현동에서 대중교통이 끊겨 어쩔 수 없이 탄 택시에서 ‘클럽 가는 여자들은 다 더럽던데. 너는 깨끗하냐?’라는 질문을 들으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덜덜 떨다가 5만 원가량 나온 택시 요금에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욕을 먹었던 어느 밤,

길 한가운데서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 술 취한 아저씨 곁을 지나가야 했던 어느 저녁,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지퍼를 열고 자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낯선 남자 앞에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다른 곳을 쳐다보던 아주머니 두 명과 내가 타고 있던 어느 비 오는 날의 엘리베이터 안.


이것뿐이겠는가. 살면서 내가 보고 겪었던 일상 속 기이한 일들이 생명에 대한 위협이자 폭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모든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모든 여자들은 꼭 한 번씩은 보고 겪었던 일상 속 이상한 일들. 결코 내 잘못이 아닌 일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밤 늦게 다니면 안 되지, 짧은 옷을 입으면 안 되지”라며 여자애가 조신하지 못하다며 마치 내 잘못인양 비난받았던 일들. 내 주변의 여성들은 꼭 한 번씩 보고 듣고 겪었던 것들.


그래서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들에게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갖는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언어의 세계 하나를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하는 이야기 뭔 말인지 알지?”

“어어, 알아. 뭔지 알아. 나도 그랬던 적 있어.”


길게 말하지 않아도 서로 다 이해하고 공감하는 걸 보면, 어찌 새로운 언어의 세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정세랑의 소설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으며 우리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라 다행이라는 조금은 황당한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진짜로,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용기가 됐는걸. 길게 상황 설명하지 않아도 뭔 말인지 잘 알 것 같은 9개의 단편을 통해, 오늘 아침에 들었던 찜찜한 잔소리는 가볍게 넘기고 다시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힘을 충전했다. 우리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만으로 이깟 세상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이 생긴다. 물론 기본적으로 공포와 절망은 늘 기저에 깔려 있지만, 나란히 손 잡고 가다 보면 괜찮은 세상으로 조금씩 변할 거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의 용기니까.


취향 저격 표지 일러스트는 수신지 작가님


그런 의미에서 오늘 꿈에서 소영 언니가 나에게 치마가 아닌 바지가 잘 어울린다고 했던 말은 왠지 모르게 의미심장하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나에게 정말 잘 어울릴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연휴 끝나고 나의 까만 슬렉스를 입고 출근해야겠다.


* 남자친구는 지금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고 있고 나는 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를 방금 막 다 읽은 상태. 문득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1932년에 헉슬리가 상상한 미래의 어느 멋진 신세계는 지금 내가 사는 세상보다 안전하고 행복할까?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내가 선정한 빛나는 문장들


“어머, 임신한 거야?”

엠파이어 라인의 원피스를 입었을 뿐인데 거래처 사람들이 물어왔다. 결혼하고 해를 넘기자, 여자는 그런 질문들을 자주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선을 넘는지 새삼 놀라웠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만큼 가깝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걸 매번 참았다. 사실 아무도, 가족도 그만큼 가깝지 않다고 여겨왔다. _ <웨딩드레스 44> 중에서


태어난 곳으로부터, 소속된 모든 집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관계로부터 도망쳐왔어.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아. 남보다 못한 가족들과도 어떻게든 인연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처음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해내고, 지옥 같은 회사를 개선시키고, 성격이 안 맞는 애인과 다투고 다퉈서는 안정적인 관계에 다다르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해. _ <효진> 중에서


“근데 파트너가 있으면 내가 다른 직장을 찾으라 때까지 바통 터치를 할 수 있잖아. 요즘 주변에 많이들 그러던데. 서로 이직할 때 버텨주고. 나는 혼자 버텨야 해. 이러다 더 아파지면…… 혼자는 서럽고 무서워.”

“음, 그런 문제는 나라가 해결해줄 문제 아닌가?”

아영이 망설이다가 반문했다.

“나라는 별로 믿음이 안 가고, 40대가…… 50대가 보이질 않아. 선배들 다 어디로 사라졌지? 우리 업계는 특히 더 심해.”

민희가 아픈 몸을 주무르며 말했다. _ <이혼 세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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