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이 필요 없는 행복도 분명히 있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22년 된 아파트다. 그러니까 22년 전 신축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화장실은 바깥에 있는 방 한 칸짜리 반지하에서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반지하로, 방 두 칸짜리 1층 빌라로, 그리고 지금의 방 세 칸짜리 아파트로 오기까지 엄마아빠는 말 그대로 악착같이 아꼈다. 이삿날 아빠는 나와 내 동생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말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데, 이게 고소공포증 때문인지, 기뻐서인지 모르겠다.”
엄마는 여간해선 볼 수 없었던 의기양양한 미소로 이건 저기에, 저건 여기에 두라며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날은 네 가족이 다 같이 거실에 누워 자기로 했다. 처음으로 동생과 각자 다른 방에서 잘 수 있게 되었지만 한껏 들뜬 표정으로 “오늘은 우리 모두 거실이란 곳에서 자 볼까?” 하는 아빠의 말에 싫다는 대답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는데 그게 베란다 밖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 때문인지 이렇게 깨끗하고 넓은 집에 살게 된 설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엄마, 아빠. 밖에서 개구리 소리 들린다. 너무 좋다. 그치?”
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더니 엄마도 맞장구쳤다.
“그러게. 엄마 어릴 때 시골 살 적에는 개구리 울음소리나 닭이 우는 소리 같은 건 지겨워서 듣기 싫었고. 얼른 서울 가서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인 줄은 이제 알았네. 당신도 그렇지?”
엄마는 옆에 누운 아빠를 툭툭 치며 이야기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우렁찬 코 고는 소리뿐이었다. 나도 엄마도 동생도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걸음마를 막 떼고 동생은 이제 갓 젖을 떼던 시절 엄마의 가계부 맨 앞장에는 ‘최선을 다하자!’와 ‘내 집 마련’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불과 십여 년 만에 부모님께서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초능력적인 일이라고 나는 자주 이야기해 왔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바라는 것이 있으면 입이 닳도록 자주 소리 내서 말해야 해. 그래야 진짜로 이루어져.”라며 그렇다고 말만 떠벌리고 다닐 게 아니라 실제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지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치고 힘이 들면 옛날 부모님의 가계부 앞장에 적힌 ‘최선을 다하자! 내 집 마련’이란 글자를 꿀꺽꿀꺽 삼키고 되뇌며 마음을 다 잡았다.
이제 나는 세상에는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천지라는 사실을 잘 아는 어른이 되었다. 노력이 얼마나 우리를 배신해 왔는지도 너무 잘 안다. 최선을 다하면 실패하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이라며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 준비하고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이십대는 ‘요령 없음’으로 점철돼 왔다. 요령 없음이 후회 없음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최근 공황장애로 상담을 받기 시작한 직장 동료를 보며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돌볼 틈도 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다가는 이도 저도 되지 못하고 망할 거야.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아. 무조건 내가 우선이야. 무조건 내가. 무조건.
며칠 전 퇴근하면서 맥주를 사들고 휘적휘적 집으로 오던 길. 22년 된 우리 아파트 곳곳에 푸르르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덩치 큰 나무들을 발견했다. 새삼스럽지만 그 초록초록함에 깜짝 놀랐다.
내가 시시한 어른이 되는 동안 이곳의 나무들은 덩치를 키우고 푸르름을 더했구나.
나는 줄곧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나 자신’을 3위나 4위 정도로 미뤄두고 1위나 2위에는 ‘엄마의 자랑’이나 ‘아빠의 말 잘 듣는 모범생 딸’을 올려놓고 착한 척해 왔는데.
가장 젊고 아름다운 지금의 초록력 같은 것을 내팽겨둔 채, 어떻게 하면 회사에서 능력 있는 직원으로 인정 받을 수 있을지 혹은 말썽 한 번 부리지 않은 착한 딸인 척 그동안 역할 놀이를 해왔던 건 아닐까.
역시. 능력 중의 능력은 초능력이 아니라 초록력이야.
그러니까 역할 놀이일랑 때려치우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초여름의 푸릇함이나 즐겨볼 것. 일단 6월에는 “모든 우선순위에는 나 자신을 올려놓자”고 입이 닳도록 소리 내어 말해 볼 것.
노력이 필요없는 행복도 있을 거라고 믿으며.
* 초능력이라든지 기적이라든지 하는 일은 내가 우리 엄마와 아빠의 딸로 태어난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나의 부모님의 나의 엄마 아빠라는 사실만으로 내게는 기적인 걸.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젯밤 갑자기 엄마가 "네가 착한 딸이라서가 아니라 네가 내 딸이라는 게 너무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뻔하고 흔한 말일지라도 무척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