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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땜쟁이’가 왜 회의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됐을까

기판을 쑤시던 손, 이제는 방향을 설계하다

by 꿀아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글쓰기

처음엔 단순히 ‘기록’이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과 그때의 온도를 남기고 싶었다. 졸업 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느라 그 시절의 열정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작은 제안을 던졌다.


“한 번 릴레이처럼 써볼까?”


누군가는 곧바로 참여 의사를 밝혔고, 누군가는 ‘글은 자신 없지만 해볼게’라며 웃었다. 그렇게 매주 화요일 아침, 순서를 기다린 동기들의 글이 내게 도착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문장이 도착할 때마다 교정의 공기와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던 토론, 퇴근 후 강의실로 향하던 발걸음, 서로의 고민을 나누던 눈빛들이 글 속에서 다시 살아 숨 쉬었다.

그 글들을 읽으며 멈춰 있던 내 시간도 조금씩 움직였다. 누군가의 문장에서 오래 전의 내가 고개를 들었고, 잊고 있던 열정이 낯설게 다시 피어올랐다.

이 브런치북은 결국 ‘우리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때의 열정이 내 안에서 다시 깨어나는 걸 느끼고 있다.

이번엔 나의 차례이다.

릴레이의 주인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그때의 ‘학생’이었던 나로서 말이다. 내가 왜 다시 교정으로 돌아갔는지, 그리고 그 시간이 어떻게 내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는지를.





1. 새로운 세상으로 향한 첫걸음


한때는 공학 박사를 생각했다.
학부로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석사까지 이동통신을 공부했으니 태생이 공돌이다.

하지만 박사 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생겼다.
내가 과연 그만큼의 끈기와 집중력을 가진 사람인가,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박사의 기준을 충족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학교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여러 커리어의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던 중, 가까운 지인들과 나눈 대화에서 한 가지 말이 오래 남았다.

“요즘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 기반의 경영학 커리어가 뜨고 있대!!”


그때만 해도 경영, 경제 같은 단어는 낯설었지만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감정이 내 마음 한편에 오래 남았다.


자동차 업계에 입문한 지도 어느덧 14년 차다.
원래 내가 있던 랩실의 선배들은 대부분 통신사나 모바일 단말 쪽 SW개발자가 국룰이다시피했다.

저는 자동차 쪽으로 가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호기로운 선택이었지만,
그 당시 자동차 업계는 산업 전체가 주목받던 때였다.
연봉도 업계 최고라는 기사가 연신 나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점이 매력적이었다.

입사 면접을 보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부 때, 석사 때 배운 내용을 몽땅 끌어와
‘자동차와 통신의 결합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지금이야 커넥티비티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만,
그때만 해도 자동차 업계에서는 막 태동되던 개념이었다.
덕분에 운 좋게 틈새를 잘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후 자동차는 침체기를 맞이했지만 말이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다.
입사 후 바로 팀에 배치되는 대신,
당시 경영층 지시로 모든 신입이 제품 검증팀에서 먼저 근무하게 되었다.
각 개발 부서 팀장이 멘토로 배정되었고, 나는 하드웨어(HW) 팀장님을 멘토로 만나게 되었다.


첫인상은 강했다. 말도 단단하고, 리더십도 있어 보였다.(하지만 싸늘했다....)

몇 번의 면담 끝에 그분이 내게 말했다.

“당신은 생긴 게 딱 우리 팀(하드웨어) 쪽이야"


생긴 게 하드웨어 같다라니....


농담처럼 들렸지만, 마음 한쪽이 불안해졌다.
그래도 석사 전공을 내세워 소프트웨어로 가겠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때는 막아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던 것 같다.

(일개 신입이 노련한 팀장의 빌드업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ㅡ.ㅡ;;)

얼마 후, 멘토 팀의 회식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퇴근 후에 잠깐 얼굴만 비춰.”
그 말이 나의 인생을 바꿔 놓을 줄은 몰랐다.
그날 회식은 길고도 뜨거웠다.
20대의 나는 술에 강했고, 끝까지 버텼다.
다음 날 출근길엔, 조금 후회가 남았다.

며칠 후, 멘토에게 전화가 왔다.
“이제 우리 팀으로 와라.”


그렇게 나는 팔자에도 없던 하드웨어 개발자 세계로 입문하게 되었다.

입사와 동시에 이직을 고민했지만,
결국 10년 넘게 그 길 위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내 커리어를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자산이 되어주었다.




2. 다시, 배움의 자리로


시간이 흘러 자동차 업계도 변화했다.

어디서나 “이제는 SW의 시대”라는 말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납땜과 기판 분석에 익숙한 개발자가 되어 있었다.
코드는 잊혔고,
눈감고 회로를 짚는 일이 더 편해졌다.

그때 다시 떠올랐다.
오랜 시간 마음속에 킵해 두었던 생각,


‘기술 기반의 경영학.’

회사 일을 놓지 않으면서도 배움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 그게 바로 KAIST IMMS였다.

하지만 몇 년을 망설였다.
속으로 시뮬레이션도 수없이 돌려봤다.
기회비용, 일정, 체력, 회사, 가정…
모든 걸 계산해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2016년, 첫째가 태어났다.
그 순간, 생각이 정리됐다.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다.”

그동안의 계산은 모두 의미가 없어졌다.
지원서를 냈고, 예상과 달리 덜컥 합격했다.
사실 지원 자체가 하나의 위안이었다.
그래서 더 놀랐다.

합격 통보를 받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이걸 정말 해야 할까?”
아이도 어리고, 회사 일은 쏟아지고, KAIST도 쉽게 학위를 주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걱정보다 설렘이 앞섰다.
마치 새로운 미션이 주어진 것처럼,
막연하지만 분명한 동기가 생겼다.

그 이후의 학교생활은 앞선 동기들의 이야기에서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2화] 함께 배우고 성장하면서 서로의 시야가 확장되었고,
[3화] 기술의 언어와 경영의 시선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웠다.
[4화] 때로는 나태해질 수 있는 시기에 다시 달리게 만들었던 힘, 그 속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과정들이 내 기준을 다시 세워주었다.

[5화] 누군가는 간판을 바꾸러 왔고,
누군가는 자신을 새롭게 증명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결국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그 배움의 흔적을 문신처럼 새기고, 다시 한 단계 위로 올라섰다.

[6화] 퇴근 뒤에 불태웠던 나의 열정, 그리고 함께 달리던 동기들의 열정이 결국 또 하나의 성장 곡선을 그려주었다.


3. 지금, 나를 만드는 것들


KAIST 정보경영 과정을 마치고 나니,
우연처럼 흘러온 기회들이 다시 내 앞에 놓였다.
졸업과 거의 동시에, 지금의 상품기획팀이 신설되었고
나는 그 초창기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처음 연구소에 들어왔을 때는 소프트웨어로 입사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하드웨어를 맡게 되었다.
그 시절엔 방향을 잃은 듯 답답하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큰 자산이었다.

HW 개발자로 10여 년을 보내면서
제품 전체의 구조와 시스템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고객뿐 아니라 설계, 품질, 제조, 협력사 등
모든 유관부문과의 협업이 훨씬 수월하다.
만약 그때 SW만 고집했다면 이런 경험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사람 일은 어떻게 마음먹고,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드웨어로 배치받았을 때,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시스템을 내가 다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임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경영자 과정을 마친 이후,
회사 쪽에서 먼저 새로운 오퍼를 제안했을 때
‘운’도 있었지만, 결국은 준비된 결과였다고 느꼈다.
그동안 쌓아왔던 경험과 시도가
지금의 업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나는 여전히 목마르다.
새로운 걸 배우고, 또 도전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확신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책을 만들고, 동기들과 함께 연재를 이어가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KAIST에서의 시간은
내 삶의 관성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함께 달리는 동기들이 여전히 나를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즐겁다 :-)




『다시, 학교로 간 직장인들』 릴레이 에세이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2017 IMMS 6기

전 자동차 업계 HW 시스템 개발자

현 상품기획 및 매니지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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