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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을 바꾸고 싶은 이들에게

전공 지우러 갔다가 문신처럼 새기고 온 썰 푼다

by 꿀아빠

공부라면 지긋지긋했다. 초중고 대학까지 지각 한 번이라도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범생이로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살았다. 대학 졸업할 때 다짐했다. 다시는 학교를 다니지 않으리라.

피아노를 전공했다. 피아니스트 꿈은 일찍이 없었고 어찌어찌하다 IT 회사 입사 4년 차. 일도 손에 좀 익었겠다, 회사 뽕도 좀 차 있는데, 건너 파트 팀장이 회사 다니면서 대학원을 갔단다. 대학원은 학벌 세탁하러 가는 거 아닌가? 대단하네.

나는 당시 회사에서 내 전공이 '발각' 되는 일에 매우 지쳐있었다.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질문들에 일일이 반응하는 건 꽤 피로한 일이었다.

"피아노?" "여긴 어떻게.." "안 아까워요?"
안 아까웠다. 다 쏟아부어서 미련이 없었다.

취직 전 수많은 서류 광탈이 다 전공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입사 지원 시스템의 전공 선택란에 예체능은 아예 없는 곳도 있었다. 회사란 곳은 상경계열만 가는 데구나. 예체능이 뭘 잘못한거냐..(이걸 뚫고 용케 취업은 했다!)

근데 카이스트 경영대학? 쩐다. 전공이나 세탁해 볼까.
나 피아노 전공한 거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만나고 싶다.. 그게 시작이었다



당시 이직 생각은 전혀 없었고 학업성취에 대한 어떠한 갈망도 없었다.
아 이제 내 전공을 숨기고(!) 동종 업계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구나~ '나 경영대 나온 여자야' 해 보는 건가 ^^*
이런 부푼 꿈을 안고 갔던 신입생 모임 첫날, 신입생 명단에 회사이름과 전공이 떡하니 공개 돼 있었다. 내 눈에는 내 전공이 거의 100 폰트로 보였다.

'스벌 망했네'

첫날 야심 찬 계획의 대실패를 겪어서였을까. 나는 솔직히 수업이 재미없었다. 정확하게는 안 맞았다.
넷플릭스, 구글이 어떤 기업정신을 가졌고 성장했는지 전혀 안 궁금했고, 회계 수업에선 '나 같은 사람이 숫자 읽고 사업하면 망하겠구나' 확신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대학원이 인생 목표였던 사람들마냥 열심히 하는 우리 동기들 옆에서 나는 안 할 수 없었다. 매 수업마다 있는 팀플에 다른 동기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자 또 열심히 했다.

평일 밤 10시 끝나는 수업에, 과제에, 논문까지. 회사랑 병행하기 정말 쉽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결국 끝을 봤다.


그러고 보니 난 회사에서도, 음대생 일 못하더라는 말 듣기 싫어서 저 편견들을 무찌르고자 더 열심히 한 것 같다. (예체능 애들 서류 지원도 못하게 해 둔 회사 놈들!) 오히려 그게 나에게 자극이 되고, 내 능력치를 끌어올렸다.
아 근데, 내 이런 근성이 다 어디서 왔나. 입시 때 하루 열 시간씩 독방에서 혼자 피아노 연습하던 짬바에서 온 거다. 나는 내 전공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전공 세탁은 애초에 실패각이었다. 그래도 이력서에 업데이트할 경영대 나온 여자야 한 줄은 생겼다.

졸업 후, 지금의 회사로 3년 전 이직을 했고 면접 전날 부서장이 궁금한 게 있다며 전화 통화를 요청했다.
간단히 통성명을 하고 난 그의 첫 질문,


"피아노를 전공했네요? 진짜 그 피아노요?"


그 질문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세줄요약]
- 간판 못 바꾼다
- 당신 자신을 더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 음대생도 졸업했다 ^^



『다시, 학교로 간 직장인들』 릴레이 에세이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IMMS 6기

전 카카오

현 삼성전자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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