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지도 모른다
대학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군 입대를 앞두고 아버지께서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하신다는 소식은 제게 작은 충격이자 호기심으로 다가왔습니다.
‘왜 사서 고생을 하실까?’라는 철없는 질문에 아버지는 묵묵히 웃으시기만 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그 과정을 깊이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습니다. 지성보다는 현장의 열정, 책상보다는 시장이 더 중요하다고 믿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2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할 즈음, 아버지의 논문이 나왔다며 꽤 두툼한 한 권을 건네받았습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참으로 오묘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연히 작아지셨을 아버지의 어깨가, 그 논문 한 권의 무게만큼은 더 커 보이는 느낌이었습니다.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고 지적 결실을 맺으려 노력한 그 끈기와 헌신이, 제게는 어떤 경외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대학원’이라는 것이 단순히 학문 탐구의 공간이 아니라,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자신을 재정의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노력의 상징일 수 있다는 첫인상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졸업을 앞두고 저는 또 다른 롤모델을 발견했습니다. 평소 조용히 혼자 동경해 오던 한 선배님께서 블로그에 대학원 진학 소식을 올리신 것입니다. 그분은 엔지니어의 전통적인 길을 따르기보다는, 컨설턴트로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분께서 KAIST IMMS라는 곳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택은 기존의 기술적 깊이를 넘어, 기술을 경영하고 시장을 읽는 전략적 시야를 확보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저는 조용히 뒤에서 그 선배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분께서 대학원을 마치고 곧바로 해외 테크 기업으로 취업을 하셨다는 글을 보았을 때, 제 안에서 일종의 실존적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지만 당장 그때의 저는 학교생활에 대한 흥미를 잃은 상태였고, 머리로 배우기보다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시장에 저를 증명하고 싶은 열정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선배님의 길을 당장 따르지 않는 대신, 취업 후에도 대학원은 언제든 갈 수 있는 길이라며 저의 지적 욕구를 잠시 유보해 두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라도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일종의 커리어 보험을 들어둔 것이었습니다.
결국 원하던 회사에 취업했고, 남들보다 다소 늦게 시작한 사회생활이였지만 그 자체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저는 직급 대비 나이가 많았지만 경험은 부족했고, 나보다 어린 선배들과 동기들이 오히려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았습니다. 그들과 어울려 즐겁게 무리를 짓고, 웃음꽃 피는 회사 생활은 비록 당시 기업 상황이 최고점을 찍고 내려오던 변곡점이라 회사 내부의 압박이 심해져 갔지만, 일이 많아질수록 경험도 쌓이는 느낌이라 즐겁게 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해온 것은 많은데, 막상 저만의 결정적인 무언가는 없다는 공허함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옆에 있는 뛰어난 동료들과 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뇌가 시작되었습니다.
저희는 모두 엔지니어였고, 담당하는 아이템과 조직별 차이가 존재했습니다만, 단순한 ‘팀바팀’이나 연공서열로 주어지는 고과 이상의 본질적인 차별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저보다 뛰어난 영역이 있었고, 저 또한 저 자신을 객관화했을 때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들 속에서 튀고 싶어 했던 성격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단순한 숙련도를 넘어, 제가 그들과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담당하고 있는 이 기술이 회사 전체의 전략과 재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시장의 거시적 흐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엔지니어의 언어만 할 뿐, 경영과 비즈니스의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시야의 협소함에 대한 답답함이 먼저 들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남들보다 2~3년 늦게 출발한 이 간극을, 단순한 근무 연한으로 메울 수 있을지, 물리적인 2년을 압축적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차별화된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결국, 저는 기술의 깊이, 업무의 양만으로는 성장이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기술 위에 전략적 시야를 덧씌우는 넓이의 확장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직장인의 매너리즘과 차별화에 대한 고민은,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가장의 소명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떤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제가 저의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하며, 끈기 있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범적인 가장의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일반적인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더 충실하게 가정을 지키고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지를 고민했을 텐데, 저는 조금 삐뚤어져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에게 좋은 아빠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아내에게 좋은 남편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오히려 어떻게 하면 더 가장으로서 인정받고 시장에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 어떻게 더 최악의 상황에서 혼자만의 뛰어난 역량으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릴지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아이에게 똑똑함, 즉 지적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뛰어난 유전자를 줄 수는 없을지라도, 후천적인 노력과 헌신으로 스스로의 지적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유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 또한 날 따라 평생 끊임없이 고민하고 발전해 나가며 살아가라.' 이러한 바람을 담았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하신 이유가, 어쩌면 가족에게 끊임없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취업한 간극을 차별화를 통해 만회하고, 동시에 아버지로서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범이 배움에 대한 열정임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과거 제가 유보해 두었던, 압축적인 지적 성장의 통로인 대학원 석사 과정이었습니다.
결심을 굳힌 후, 저는 가장 먼저 아버지께서 선택하셨던 전공을 따라 지원했고 면접까지 보았습니다. 단순히 아버지를 따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인턴 때도 아버지 회사에 지원하여 다니는 등, 저는 무의식 중에 아버지의 길을 좇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합격 통보를 받고 나니, 제 안의 반항심과 개인의 판단이 충돌했습니다. 아버지와 굳이 똑같아야 할까? 이미 엔지니어로서의 학구열에는 크게 감흥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갈망하는 것은 엔지니어들의 세계가 아닌 세상이 돌아가는 경영학적 소양과 통찰이었습니다. 기술은 강력한 도구이지만, 그 도구를 어디에 어떻게 써야 최대의 비즈니스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을 얻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더 이상 엔지니어들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기술과 경영을 잇는 브릿지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 욕구가 공학 석사에 대한 매력도를 능가했습니다.
결국 저는 정보경영에 관련된 학과를 택했습니다. 다양한 학교와 전공이 있었습니다만, 어린 시절 제게 기술 위에 전략을 구축하는 커리어 패스의 좌표를 찍어주었던 그 선배님의 학교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동경을 넘어선, 제가 추구하는 모델을 따르겠다는 전략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석사 과정은 어쩌면 도피도, 또한 단순히 스펙 한 줄 추가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그토록 갈망했던 차별화를 위한 투자이자 아버지와 아이에게 보여줄 멈추지 않는 성장의 약속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육아, 직장, 학업이라는 삼중고를 짊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혼란 속에서야말로, 기술적 사고와 경영적 통찰을 융합하여 복잡한 비즈니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저 자신을 빚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이가 태어난 바로 다음 날,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응원을 한 몸에 받으며 첫 수업을 들으러 나섰습니다.
2017년 카이스트 정보경영 IMMS 6 기
전 현대 자동차 엔지니어
현 산업 분석 및 컨설턴트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