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잔액이 부족하다는데요.”
“그러면 이거 하나 뺄게요.”
순간 너무나 창피한 기분에
서둘러 눈앞의 막대 사탕과 캔맥주를
챙겨 들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수중에 돈이 얼마 없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술안주 하나 제대로 사지 못할 만큼
잔고가 바닥이라는 현실에
내 정신은 다시 한번 무너진다.
오전부터 쏟아지는 땡볕을 맞으며
한강 둔치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평일 오전,
나는 이 시간의 이곳이 참 좋다.
노숙자, 부랑자, 패배자,
길을 잃은 이…
피폐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자면
그래도 내가 이 무리에 속해 있다는 생각으로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이 편안해진다.
술기운이 올랐는지 안전 방벽을 넘어
사람이 드문 장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한 발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만 삐끗하면 강물에 빠지는
아찔한 위치였지만,
이에 한술 더 떠
두 눈마저 질끈 감은 채 계속 걸었다.
어서 그 미친 짓을 그만두라는
마음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빌어먹을 운명을
시험하고 싶었다.
내가 정말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면
겨우 이 정도 일 따위로는
죽지 않아야 정상이 아닐까.
눈을 감고 계속 걷다가
발끝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며
그만 앞으로 픽 고꾸라졌다.
나는 실없는 사람처럼 웃었지만,
이는 강물에 빠지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다
내 예상이 맞았다는 허탈감에 나온
웃음이었다.
나는 왜 나로 태어났을까.
우리는 누구나 일인칭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따라서 모든 삶의 중심은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럼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을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지금 내가 바라보는 이 세상이
어쩌면 실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자주 하고는 했다.
혹시 내가 죽으면
그 시점에서 모든 세상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마치 신이 만들어 놓은 방송 무대처럼
이 모든 것은 나를 촬영하기 위한 소품이었고,
이제 내가 없게 되면
해당 무대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체제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내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고
나에게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
고로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며
아무런 이유 없이
또 아무런 유산 없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내 개똥철학의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주인공인 나는
늘 삶에서 승리를 해야 할 텐데
왜 계속 패배만 하는 것일까.
왜 힘든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일까.
실은 이제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그대로일 수 있고,
나는 그냥 별 볼 일 없이
한낱 스쳐 가는 조연 중에
한 명일 수 있다는
시시한 생각마저 든다.
한동안 깊은 상념에 빠져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조금 전 구입한 막대 사탕이
손에 들어온다.
포장지를 주섬주섬 벗기고
사탕을 입안에 쑤셔 넣자마자
내 몸을 감싸는 달콤한 기운에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에는 몇 걸음 못 가
타는 듯한 목마름에 이끌려
가방에 들어 있던 캔맥주를 꺼내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흡사 맹물과도 같은 느낌…
예전과 달리 술이 하나도 쓰지 않다.
사람이 정말 많은 일을 겪고 나면
그 뒤에는 정신이 무뎌진다고 한다.
아니, 내성이 생기며 강해지는 것이다.
사탕의 단맛이 술의 쓴맛을
상쇄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부정적인 사건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이 모든 실패와 아픔은
단지 나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
나에게 건네는 일련의 과정 중
하나이지 않을까.
아직은 아니다.
내 삶을 포기할 순간도
주저앉아 버릴 순간도
아직은 아니다.
나는 내가 믿는 이 운명적인 세상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꼭 가려내야 한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맞는지
내 삶의 그 수많은 패배 끝에
결국에는 승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것 역시 꼭 밝혀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 삶의 결말을
반드시 지켜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