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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개진 초콜릿

by 어린 왕자
뭉개진초콜릿_브런치_베스트.png

“저기…”


아무도 없다.


“저기……”


역시 아무도 없다.


잘못 들은 걸까?

평소에 다니지 않는

큰 도로 옆 비좁은 샛길.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이내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내 옆을 쌩쌩 지나쳐 가는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초라한 발걸음 소리.


비좁은 그 샛길이 끝나 갈 무렵,

내 앞에는 도로를 가로질러

처음 보는 작은 소녀가 주먹 안에

무언가를 꼬옥 쥐고 서 있었다.



그 아이는 누가 볼세라 나에게

손안의 내용물을 재빨리 건네주고,

다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소녀의 손에서 내 손으로 건너온

작은 종이에는 귀여운 손 글씨로

시간과 장소가 쓰여 있었다.


‘밸런타인데이…’


방금 전 일어난 일이었지만,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 어떤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그 날짜 그 시간에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이가 적어 준 장소의 커피숍에는

두 명의 여학생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이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히 대조되었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픽 하고 나왔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작은 체구의 아이가

며칠 전 샛길에서 만난 그녀라는 사실을…



나를 호출한 그 아이는

내 앞에서 단 한마디도

입을 떼지 못했다.


흡사 인형술사의 복화술처럼

그 아이의 모든 말은

그녀 옆에 당차 보이는

친구의 입을 통해서만

내게 닿을 수 있었다.


이후로 한참을 이야기가 계속 흐르고,

그녀의 하얀 캔버스 백에서 나온

예쁘고 네모난 선물 상자가

내 앞에 놓이게 되었다.


한 번, 단 한 번 웃어라도 줄걸…


나는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내 앞의 그녀와 선물 상자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그날 저녁, 피시방에서 친구들과 모여

여느 날처럼 게임을 하고 있었다.


“와, 이거 뭐야?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받았냐?

대박이네. 같이 먹자!”


친구들이 벌떼처럼 내 자리로 몰려와

무슨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선물 상자를

들었다 놨다 난리를 친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란 듯

친구들에게 선물 상자 속 초콜릿을

성탄절 산타클로스처럼 나누어 주었다.


마치 아무런 대책 없이

그녀를 만나러 갔던

오전의 내 모습처럼 말이다.



피시방 시간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몇몇 초콜릿은 피시방의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눌어붙어

뭉개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십수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초콜릿 선물 상자는

내 서랍 한편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당시 남은 초콜릿 몇 개가

빛바랜 화석같이 상자에 눌어붙어

뭉개져 있는 것이 눈에 밟힌다.

내 기억 저편의 그녀와

초콜릿처럼 말이다.


회상 속과 눈앞의

뭉개진 초콜릿을

포개어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해 보았다.



그날 내가 뭉개 버린 것은

그녀에게 받은 초콜릿이었을까.

아니면 작디작은 그 마음이었을까.


무엇이 되었든 그녀는

참 많이도 아팠을 테다.


그때의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어렸고,

또 많이 여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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