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장소였던 것 같다.
내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던 순간은…
밥을 먹으러 들어갔던 레스토랑,
차를 마시러 들어갔던 커피숍,
그리고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작은 칵테일 바였다.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칵테일을
주문하는 그 아이의 얼굴은
결국 내 짜증을 정점에 찍어 놓았다.
“오빠, 이거 먹어 봤어?
커피에다가 술을 섞은 건데…”
그녀의 수다를
전부 들어줄 수는 없었다.
내 머리는 벌써 세 시간 전을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만나서 첫 번째로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올 때에는
나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냥 자연스레 내가 계산을 했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후식을 먹을
커피숍을 찾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로 들어간
커피숍에서 내가 계산을 마치고
주문한 커피를 그녀에게 건네주었을 때,
좋지 않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휙 하고 지나갔다.
조금 전에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잘 먹었다, 잘 먹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주는 것만
넙죽넙죽 받아먹는 그 아이가
얄미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커피숍을 나선 뒤에도
칵테일을 먹어 보고 싶다며
지하에 있는 술집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얌체 같았다.
물론 누가 돈을 내고,
누가 돈을 얼마큼 쓰고,
이런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정말 잘 먹었어.
이거 오빠가 계산해서 괜찮겠어?
꽤 비싼 것 같은데…”
이런 작은 인사치레조차
없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은 조금도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더 앉아 있으면
이런 치졸한 문제로
기분 나쁜 말이 오갈 것 같아,
나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한 번에 들이켜고
그만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역시 그곳의 계산도 내가 했고,
이번에도 작은 인사치레 하나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내가 계산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 아이의 모습은
내 생각을 완전히 굳혀 놓았다.
‘그래, 이제 어지간하면
만나지 말아야겠다.
사람이 참 얄밉네.’
그렇게 좋지 않은 생각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기분 역시 매우 좋지 않았다.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휴대 전화를 열어 보니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여러 개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빠. 정말 미안해.
요즘 내 사정 안 좋은 거 들었지?”
“오늘은 얻어먹기만 할 거 같아.
다음엔 꼭 내가 살게.”
“정말 맛있다.
오빠, 너무 고마워.”
우리가 옮긴 장소마다
정성스레 한 자 한 자
적혀 있는 메시지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
그날, 나는 참 바보 같았다.
‘좋지 않은 생각’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했다.
새가 불시에 자신의 머리를
휙 하고 지나가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지만,
새가 자신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누구나 쉽게 막을 수 있다.
이렇듯 좋지 않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지만,
그 좋지 않은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떨쳐 내 버리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끔, 나 역시
좋지 않은 생각들이
머리에 떠오르곤 한다.
‘양심을 저버리는 생각’
‘도덕성을 배제하는 생각’
‘악하디악한 생각’
욕지거리를 내뱉을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이 미워지거나
그 사람을 저주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은
결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완전하고 온전한 존재인
신이나 부처가 아닌
그저 불완전한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나에게 찾아오는 좋지 않은 생각을
원천 봉쇄하고 막아 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좋지 않은 생각이라는
시련이 나에게 닥쳤을 때,
그 시련을 조절하고 제어해서
극복해 나가는 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셈이다.
좋지 않은 생각이
더욱 커 나가지 않게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래는 일.
악한 마음을 몰아내고
다시 내 마음에
평정을 되찾는 일.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좋지 않은 생각을
품지 않는 완전함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