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었다.
후텁지근한 승강장에서
지하철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연신 손부채질을 해 보지만
더위는 가시지 않고
불쾌감만 무던히 쌓여 간다.
주룩주룩 땀이 쏟아지는 가운데
드디어 지하철 문이 열렸다.
‘아니, 왜 이렇게 안 시원하지?’
기대와 달리 열차 안은 몹시 더웠다.
내가 올라탄 이 칸이 혹시 약냉방 칸이 아닌지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그 순간 너무나도 편안해 보이는
승객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 열차에 먼저 타 있던 이들 중에
누군가가 관제실에 민원을 넣어서
열차 온도를 높여 놓았구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왜 이리도 우리나라에는
이기적인 사람이 많은 것일까.
이제 막 열차에 오르는
더위에 쩌든 사람들은
열차 안이라는 오아시스만을
목 놓아 기다렸을 텐테…
민원을 넣은 사람은
단지 본인이 조금 춥다는 생각으로
열차의 온도를 확 높여 놓았을 것이다.
얄밉기 그지없지만
이를 어찌할 방도 역시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에어컨 송풍구를 찾아서
그 아래에 섰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나고 나니
다행히도 더위는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추위에 몸이 움츠러들 때쯤
내 마음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 막 열차를 타는 몇몇 사람을 위해
열차 안의 온도를 많이 내려놓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물론 열차를 막 탔을 때에는
덥고 짜증이 나겠지만,
잠시만 참으면 이처럼
금세 시원한 상태가 되는데
굳이 열차에 있는 모든 승객이
이제 막 승차하는 소수를 위해
추위를 견뎌야 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처사일 수 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더운 사람의 입장을 대변하던 내 마음이
180도 변하던 순간이었다.
더위와 추위라는 단순한 촉각에 의해서도
사람의 마음이란 이토록 요동치고 만다.
마음이 옮겨가고 변하는 것이
또 어찌 이뿐일까.
차를 타고 지날 때에는
신호등의 신호가 너무 길게 느껴지고,
인도로 걸어다닐 때에는
신호등의 신호가 무척 짧게 느껴진다.
내가 약속 시간에 10분 늦을 때에는
상대방의 기다림이 사소해 보이고,
상대방이 약속 시간에 10분 늦을 때에는
온갖 짜증이 샘솟는다.
사람이란 것이 그렇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려 해도
본인이 놓인 처지와 입장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한 이 넓은 세상에는
지금 내 위치에서
절대 보이지 않는 것들도
무수히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끔씩
나라는 존재를 배제한 채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아니,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서도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타인에게는 해악이 될 수 있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
타인에게는 유익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이런저런 과거의 지난 내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항상 성인처럼 살아가고 싶지만
아직도 나의 마음은
참 어리석기 그지없는 듯하다.
내 처지에서만 생각을 고집하고
내 입장만 내세웠던 예전의 장면들이
하나둘 머리를 스쳐 간다.
그리고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아직도 무더운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