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서 잘 운다. 혼자 들른 절에서는 더 잘 울고, 오후에 들러 저녁 여섯 시 범종 소리를 들으며 내려올 땐 어김없이 눈물 바람이다. 종교는 없지만, 불교 취향이라고 거듭 말하는 나. 감성 과잉이라 쉬이 애잔해지는 나에게 조용히 내 감정에 사로잡혀도 좋을 만한 곳으로 절만 한 곳이 없다.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울 일인가. 리탕사와 벵푸사. 티벳의 두 사찰에서 꺼이꺼이 북받쳐 울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옆에 섰던 동행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물을 촉발할 만한 사유(思惟)나 고뇌의 단초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무리에 어울려 조곤조곤 수다도 떨고, 웃기도 하다가 불상 앞에 잠시 숨을 모으던 순간, 슬픔이 차올랐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비애였다. ‘슬픔이 차오른다’는 말의 의미를 몸이 먼저 이해했다. 제 3자의 것 같던 격렬한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의식이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품어 눈물로 뱉어냈다.
길지도 않지만 얕지도 않은 울음을 알아챈 지인은 무속인 친구에게 데려가 봐야겠다고 했고, 친구는 정신과 진료 예약을 해줘야겠다며 농담처럼 말했다. 두 사람 다 공통적으로 ‘전생’을 운운했지만,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다. 전생에 큰 죄를 짓지 않았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고만고만하게 살고있는 거겠지. 죄를 지어 요만요만한 사람으로 세상에 다시 온 건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여행의 절정은 종종 허무와 맞닿아 있다. 흥이 오르다가도 난데없이 허무가 달겨든다. 대하소설 같은 풍경에 거듭된 찬탄도 질려갈 무렵, 절정의 장면에 이르러 비명과도 같은 한숨을 뱉고 나면 홀연 무언가 쑤욱 빠져나간 듯 허허로워진다. 풍경을 쫓는 욕망이 그제야 사그라들고, 난리가 휩쓸고 간 폐허 같은 비애가 내려앉는다. 동티벳의 산하는 거침이 없었다. 산은 장쾌하고, 물은 호탕하고, 들은 적요하며 하늘은 내 이마와 가까웠다. 유난히 자주 허허롭던 까닭은 감동의 진폭이 그 어떤 여행지보다 컸던 탓이겠지. 사찰에서의 울음도 그와 비슷한 결의 감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무념무상으로 바보 천치에 가깝게 여행하고 돌아왔는데, 이상하리만치 많은 물음표를 안고 돌아왔다. 카메라에 담아 온 사람들 얼굴이 눈에 아른거린다. 사진을 인화해보려 생각하긴 처음이다. 그들의 얼굴이 답을 주려나. 되짚어보면 모두 ‘답은 네 안에 있어요’라고 말하는 얼굴들이다.
보름 여의 여행 에피소드를 제법 길게 써내려가다, 문득 새 페이지를 열고 뱉어내듯 끄적이고 있다. 써재끼고 뱉어내는 것이 답을 찾아가는 첫 단계이거나, 조금 빠른 지름길일 수도 있다고 위안 삼는다. 웃지 않고 저절로 웃어지는 티벳 사람들의 얼굴처럼, 쓰지 않고 저절로 써내려지는 글이 우리를 평온으로 이끌길. 저절로 울어진 눈물의 용도도 아마 그와 같지 않을까. 맑아지고 순해지고 안온해지는 것. 여행의 용도도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