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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May 06. 2023

만학도에게 쿠알라 룸푸르는

살아보기. 외국에서 살아보기. 쿠알라 룸푸르 일상.

일주일의 적응 기간이 지나고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굳이 일주일씩이나 미리 시간을 뺐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마일리지로 비행기 표를 구매하느라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훗날 혹시나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이삼일 정도만 일찍 오고 공부를 마친 후에 넉넉히 시간을 주어야겠다. 도시에서 사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살면서 익혀도 충분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여기도 5월 1일 월요일은 공휴일이었던지라 화요일에 수업이 시작됐다. 어제, 목요일은 또 그들의 명절, 수업 첫 주인 이번 주에 어제까지 총 세 번의 수업을 들었다. 주 5일의 빡빡한 일정을 각오하고 온지라, 에너지가 남았다. 휴일인 오늘, 오전에 ‘바투 동굴 사원’에 다녀왔고, 숙소에서 잠시 쉬다 카페에 와 앉았다. 여기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여행자로서의 들뜬 마음 때문일까. 먹어본 스벅 아아(Ice America) 중 제일 맛있다.




첫 수업은 강력했다. 수업 자체보다는 같은 반 학생들의 구성이 충격적이었다. 학원 근처를 며칠 전부터 서성이며 아랍권 청년들이 학원이 밀집한 이 구역의 주요 구성원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있었다. 알면서도 바랬나 보다. ‘나 같은 부류의 인간이 하나나 둘 정도는 있겠지’라고 기대했었나 보다. 내 또래(40대 까지를 내 또래에 포함시키겠다)의 만학도를 한 명쯤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근거 없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연휴 다음이라 그런지 결석한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지금까지 만난 우리 반 친구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예멘 두어 명, 아프리카 모리타니 등에서 온 아들 또래 청년들과 딸 또래쯤의 한국 여자분. 이 와중에 만학도, 얼마나 멋쩍겠는가. 지중해의 '몰타'로 시니어들이 휴양 겸 어학연수를 가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굳이 시니어로 분류되는 것도 싫었지만 자식 같은 주니어들만 있는 클래스에서 수업하는 것도 되게 신나는 일은 아니다. '꼽사리 낀 만학도 급우, 주니어들이 더 싫을까' 싶기도 하지만. 나의 아들, 딸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젊은 친구들은 남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나만 조금 뻔뻔해지면 되는데, 그건 내게 제일 어려운 일.

      

이렇게나 아무것도 안 알아보고 온 게 사실이다. ‘아무렴 어떠냐’ 생각했던 것 같고, 물론 처음엔 좀 놀랐지만 역시나 지금도 생각은 같다. 아무렴 어떤가. 그저 외국에서 공부하며 살아보기를 한번쯤 경험해 보려 왔을 뿐, 친구를 사귀어 보겠다고 온 것도 아니니. 놀란 마음 다독이고 환경 적응에 이어 학원 적응 모드를 며칠만 묵묵히 이어가면 될 뿐이다. 가벼운 긴장을 느끼며 무사히 수업 첫날을 마쳤고, 숙소에서 혼자 조용히 축배를 들었다.

      

수업 내용은 반은 좋고 반은 그저 그렇다. 문법, 읽기 쓰기를 진행하는 선생님과 듣기, 말하기를 진행하는 선생님, 두 분이 오전 오후 나누어 진행한다. 수업시간 90분에 쉬는 시간 15분은 적당하고, 점심시간 45분은 좀 짧다. 정규 수업 이후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추가 수업은 레벨과 상관없이 참여해 간단한 말하기, 쓰기를 한다. 여기서 비로소 또래의 학습자들을 만나며 마음이 편해졌다. ‘나만 별난 사람인가’라는 생각에 자꾸 집착한다. 사실 좀 별스러운 것도 사실인데, 유난스러운 게 나만은 아님을 확인해야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네 시 반까지 이어지는 수업, 종일 영어공부를 한다 생각하면 꽤 빡세게 느껴질 수 있으나, 수업시간 자체가 빡빡하지 않아서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다. 빈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주 5일 수업 일정을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 낯선 환경에서 여백이 너무 많은 것은 마음을 조금 가라앉게 한다.

       



오전에 문법과 읽기, 쓰기를 지도하는 Adnan은 캐나다 남자 선생님이다. 대한민국이 워낙 문법 강국이라 그런지 문법 레벨 자체는 좀 낮은 편이나 그것을 영어로 주고받으며 배우는 과정은 흥미롭다. 새로운 어휘가 나올 때마다 그 어휘를 영어로 풀어 설명하는 그의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네이티브 스피커이니 당연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연 내가 우리말을 그렇게 쉽게 풀어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적절한 예를 들어가며 이해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갸웃거리게 된다. 우리 눈엔 그가 영어를 잘 '말'하는 사람이지만 실제로 그는 말로서의 영어뿐 아니라 국어로서의 영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일 거라 추측해 본다. 그의 수업은 즐겁다. 속도도 발음도 너무나 적당해 나는 끊임없이 중얼대며 그의 말을 따라 하려 노력한다. 영어실력이 혹시나 는다면 어쩌면 이 때문일지도.     


오후 수업은 인도 출신 Niah 선생님의 말하기, 듣기 수업.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육류는 물론 달걀, 생선 등 채식 이외의 것을 단 한 번도 입에 대 본 적이 없단다. 가문의 전통이기도 하며, 그보다는 지구 생태를 위하는 일에 그녀는 더 큰 의미를 둔다고 한다. 100 퍼센트 순도의 베지태리언, 존경을 표한다. 수업은 말하기 수업 치고는 좀 딱딱한 편이다.     




학원 전체에 가장 많이 포진하고 있는 건 예멘 학생들. 그들에게 비자를 그나마 쉽게 내주는 나라가 말레이시아, 어학원 과정을 마친 후 그들은 이곳에서 대학 진학을 원한다. 10개국 이상을 여행했다는 나와 또 다른 한국 학생의 말에 'strong passport'라며 부러움을 금치 못한다. 입국을 곧잘 거부당하는 그들이기에, 말레이시아는 그런 면에서 꿈의 나라인 모양이다. 해외여행에 대해서 얘기 나누며, 이어지는 내전과 나쁜 경제 상황으로 예멘을 찾는 이는 잘 없다고 말할 때 Ahmed는 슬퍼 보였다. (예멘 청년 아흐메드는 인싸 중의 인싸, 친절하고 명랑하며 낯선 아줌마인 나에게도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장난을 친다. 잘 컸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귀엽게도 이 친구들은 끊임없이 손을 들고 "티처! 티처!" 불러대며 질문을 쏟아낸다. 어이없게 쉬운 단어를 가끔 못 읽거나 모르기도 하지만 대개는 술술 문장을 잘 이어간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이 청년들에게 허락된 세계가 너무 좁다. 서울에 꼭 가고 싶다고 말할 때 아흐메드의 눈빛이 이글거리던데. 입양을 하거나 취업 주선이라도 해야 하나. 될 리 없는 말이겠지. 나도 Sana에 꼭 가보고 싶다고 아흐메드에게 답해주었다. 예멘의 수도가 Sana인지, 미리 공부해 가길 잘했다. 이제 나는 '예멘'을 겨우 이름만 들어본 사람에서 예멘에 친구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면 조금은 과장이겠지만). 언제고 예멘에 가볼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손톱만큼 세상이 넓어졌다.


당황하긴 했어도, 알지 못하는 세계를 접하는 일은 여전히 설렌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딱 우리 아들처럼 철없고 해맑은, 그러나 열정적인 이국의 청년들을 바라보는 일도 즐겁다. 행운을 빈다, 친구들.       




한 달의 시간과 적당한 경비가 허락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대한 많이 돌아볼 수 있는 여행의 시간을 갖고자 할 것이다. 특정 지역에서 한 달 살기를 한다 해도 그곳을 기준으로 이동할 수 있는 주변 지역을 가능한 많이 여행하려 할 테지. 70 퍼센트 이상의 시간을 교실에만 앉아있는 일을 누가 하려 할까. 하지만 나는 만학도가 되기를 선택했다. 우선 나는, 언어를 배우는 일이 좋고 배운 언어를 '뱉는' 일이 즐겁다. (얼른 '뱉는' 수준이 되고 싶다. 아직 그 수준은 아니기에. 지금은 영어를 말하기 위해 고심해야 하는 단계니까.)


또한 이 시간은 나의 한풀이 시간이기도 하다. 2년 전 나의 제주 한 달 살기에 대해 젊은 직원은 "아, 배낭여행 하듯 다녀오셨네요!" 라며 정곡을 찔렀다. 그런 여행을 원했던 게 맞다. 굳이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젊고 어릴 때 배낭여행이 가고 싶었다. 어학연수를 가고 싶었다. 절박한 바람이었다.


나는 그렇게 지금 젊은 날의 한풀이를 하고 있다. 먼 훗날 돌아보면 의미 없는 시간이고 의미 없는 지출일 수도 있지만 무모하게 저지른 용기가 소심한 포기보다는 늙어서 돌아보기에도 나을 것이라 위안 삼아 본다. 한풀이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이 조금 많아서. 아직은 덜 늙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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