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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May 10. 2023

'맛알못'에게 쿠알라룸푸르는

살아보기. 외국에서 살아보기. 쿠알라 룸푸르 일상 - 먹고사는 일

쿠알라 룸푸르에 머문 지 보름. 먹고사는 일은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 음식이 장벽이 되지 않아 다행이다. 먹는 일에 큰돈을 쓰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다. (날아가는 종류의 쌀이긴 하지만) 밥을 주식으로 먹을 수 있어 다행이다. 채소 찬이 많아서 다행이다. 말레이식, 중국식, 인도식, 태국식 등 종류가 많아서 다행이다. 슈퍼마켓에 가면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면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 먹어보진 않았지만, 한식도 한국 가격 수준이라 다행이다. 주류가 비싼 걸 빼면, 먹고사는 일은 전체적으로 참 다행이다.   

 

나름의 룰을 세웠다. 점심은 (주류 없이) 외식, 저녁은 맥주 두어 캔을 곁들여 숙소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식당 메뉴에 주류가 없는 경우가 많고 있다 해도 밥값에 비해 꽤나 비싼 탓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즐기는 한잔의 여유와 낭만을 포기하기는 여전히 어려워 맥주가 있는 숙소에서의 간소한 밥상을 선택했다.




점심에는 학원 앞 대형 푸드코트를 주로 이용한다. 다소 열악한 구내식당 분위기랄까. 대략 열 개 정도의 코너가 있는데 뷔페식 밥집이 몇 군데 있다. 그중 단골로 서너 끼를 먹은 집은 찬의 종류가 엄청나다. 닭요리가 제일 많고(이슬람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다), 바지락찜이 특히 맛있으며, 계란 찬 두어 개와 숙주, 브로콜리, 모닝글로리, 레이디 핑거, 셀러리 등 다양한 채소 찬이 즐비하다. 접시에 담아 가면 주인장이 눈대중으로 값을 매기는 게 재미있다. 첫날은 채소 찬이 많은 줄 모르고 육류를 미리 담았더니 9링깃(2700원), 다른 날은 야채 위주로 담으니 8링깃(2400원) 정도 한다. 육류가 많다면 10링깃(3000원)까지는 나갈 듯. 


쇼핑 몰이나 조금 그럴싸해 보이는 식당에서도 식비는 보통 4~5천 원을 넘지 않았다. 그도 참 저렴하다 생각했는데, 3천 원 이하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니 먹을 때마다 흐뭇하다. 저녁에 맥주 좀 곁들여도 되겠다. 가격이 너무 좋으니, 뷔페식을 포장해 와 저녁에 데워 먹기도 했다. 고기를 포함해 푸짐하게 담았는데 떨이 분위기로 싸게 주셨다. 8링깃 2400원. 이러니 반하나 안반하나.  


며칠 전 국립 모스크에 다녀오며 정말 말 그대로 '아무 데나' 대충 들어가서 점심을 먹었다. 콩글리쉬와 말렝글리쉬(?!)가 잘 통하지 않은 탓인지 볶음면을 시켰는데 입천장 델 것 같은 뜨거운 국물 국수가 나왔다. 사장님과 직원의 눈빛이 다정해 잘못 나온 음식에 대해선 한마디도 더하지 않았다. 계산하고 나오며 엄지 척을 표현할 만큼 맛도 좋았다. 아이스티 한 잔을 포함해도 3천 원이 넘지 않는다.  더운 날 먹어도 맛있는 뜨거운 국수. 여기서 이열치열을 경험할 줄이야.




여행을 오면 이렇게나 자린고비 짓을 하게 된다. 돈을 벌지 못하는 반백수라는 콤플렉스도 있지만, 하루 세끼의 식사에 돈을 아끼면 여행 경비를 제법 아낄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나는 '맛알못'인 편이고, 식도락을 즐기는 편도 아니니 굳이 먹는 일에 큰돈을 들일 이유도 없다. 혼자 먹는 식사는 편하면서도 고역인 게 메뉴를 고르는 일이었다. 밥때가 돼도 대개는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식욕은 있는데 취향이 없다고 해야 할까. 그런 이유로 제주도에서는 한 달 살기를 하며 많은 끼니를 김밥으로 때우기도 했다. 


쿠알라 룸푸르에서는 오히려 그런 고민에서는 자유롭다. 다양한 종류로 갖춰진 학원 앞 푸드코트 덕이기도 하고, 가격이 착한 로컬 식당들도 선택의 부담을 줄여준다. 먹고 싶은 게 딱히 없는데 거기에 돈 만원 가까이 쓰는 일은 늘 조심스러웠다. 서울에 버금가는 대도시 한복판에 이렇게나 저렴한 서민 식당이 많다는 것이 참 부럽다. 한국에도 이런 식당이 많다면 좋을 텐데. 하루 세끼, 한 달 90 끼, 일 년 1080 끼를 절약할 수 있다면 젊은이들 주머니 사정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편의점 식사도 좀 줄이고, 집도 금방 사....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결 사람이 윤택해질 듯하다. 


자린고비 짓을 하는 거에 비해 매 끼니를 충분히 즐기고 있다. 숙소식으로 해결하는 저녁 식사도 나름 즐겁다. 사흘간 연달아 똑같은 미고랭(볶음면)과 달걀로 저녁을 해결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문제 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배려할 필요 없이 오직 나만을 위해 차리는 이기적인(?) 식사는 얼마든지 간소해도 좋고 또 얼마든지 느려도 좋으며 내 속도대로 취해도 좋다. 가장 초호화 식사를 꼽으라면 쇼핑몰에서 포장해 온 초밥으로 그야말로 특식, 여덟 피스에 6천 원쯤 했다. 나를 위해주고 싶은 그 어떤 좋은 날에 초밥 특식을 재현하련다. 그때는 열 피스쯤 사 올 참이다. 


거르던 아침식사도 여행 중엔 꼭 챙겨 먹으려 애쓴다. 객지에서 갑자기 기운 떨어지면, 왠지 더 서글플 것 같아서. 무엇이 그리 피곤했는지, 입가가 헐었다. 사과, 멜론, 망고, 서울에서 잘 안 사 먹던 과일도 챙겨 먹는다. 비타민 보충 좀 하라는 학원 리셉션 직원의 다정한 말 덕분이다.




두 번쯤 큰 장을 봤다. 먹거리와 생필품 등을 적당히 샀는데도 한 번은 만 오천 원 정도, 또 한 번은 이만 원을 조금 넘겼다. 역시나 자린고비 장이다. 가장 싼 것을 찾아내려 눈을 부라린다. 자린고비 여행 생활인 혹은 생활형 여행자로  더 많은 곳을 여행하고 싶다. 아니, 살아보고 싶다. 식비 삼천 원을 기준으로 여행할 수 있는 나라의 목록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런 면에서 ‘맛알못’에겐 여행이 조금 더 쉽다. 맛집에 대한 욕구가 적고, 취향에 대한 집착이 적으며 특식에 대한 기대가 적다. 끼니를 고르는 것보다는 안주를 고르는 게 쉬우니 '맛알못'이면서 주당이라면 여행은 더구나 쉽다. 술의 흥이 음식에 대해 더 관대해지게 만들기도 하니까.


어디서나 기본으로만 산다면 살 만하겠다. 관광객으로 지내자면 돈이 꽤 들고, 여행자로 살아도 적잖이 들지만 생활인으로 살아간다면 어디서든 한 달쯤은 지낼 만하지 않을까. 보름 살고 결론 내리긴 좀 이르지만 So far, so good! 짧은 영어로 '맛알못' 여행생활인의 쿠알라룸푸르 먹고사는 일을 깔끔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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