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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May 30. 2023

역마살에게 쿠알라룸푸르는

싱가포르에 점 하나만 찍고 왔다

공부만 하다 가자고 작정하고 와놓고선. 돌아갈 날이 다가오니 발바닥이 간질거린다. 오기 전부터는 물론이고 이곳에 와있는 동안에도 동남아를 경험한 많은 지인들이 쿠알라 룸푸르를 기반으로 싸돌아 다녀야 할 곳을 꽤 여러 곳 제안해 주었지만 그다지 동하지 않았다. 별다른 여행 욕구가 없었던 차에 갑자기 싱가포르행을 결정하게 된 건 단순한 호기심 하나 때문이었다.


'버스로 국경을 넘는다.'




그 과정이, 그때의 기분이 궁금했다. 비행기로 국경을 넘는 것과 어느 만치 다르게 느껴질까. 나는 무엇을 더 선호하려나.  앞 뒤 가리지 않고 호기심 딱 한 가지로 여행을 정해버리는 건, 그것도 출발일 전날 저녁이 돼서야 급하게 예약해 버릴 수 있는 건 역마살을 가진 자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오고 가는데 열두 시간 가까이 시간이 걸리는데 허락된 시간은 딱 이틀뿐이다. 새로운 나라를 혹은 도시를 여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일정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난 그저 버스 타고 국경을 넘으며 여권에 도장만 꽝! 찍으면, 그걸로 미션 클리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버스로도 연결되고, 자차로도 넘어갈 수 있고, 오토바이를 타고도 씽씽 넘나 든다. 말레이시아 남단 조흐바루에 살면서 다리 하나를 건너 싱가포르로 매일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던데, 두 나라 간의 물가와 주거비의 갭이 워낙 크니 그런 모양이다. 말레이시아의 도시중 하나였던 싱가포르가 독립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음을 여기 와서 알았다.  1965년.




쿠알라 룸푸르에서 싱가포르까지 가는 '에어로라인' 버스가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차 한번 환승할 필요 없이 버스 한 번 타는 것으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된다. 왕복 258RM(링깃), 우리 돈으로 77,000원 정도니 주말 해외여행 치고는 가격도 괜찮다. 이따금 KL - 싱가포르 왕복 6만 원 이하 비행기 티켓도 뜬다곤 하지만 주말엔 택도 없는 일. 게다가 공항까지 가는 시간과 경비, 두 시간 이상 미리 대기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괜찮은 여정이다.


왕복 노선에 기내식 아닌 차내식이 각 한 번 포함되고, 커피(핫초코), 담요도 제공되며 넉넉한 공간에 영화도 볼 수 있어 비행기로 치자면 미미하나마 비즈니스 클래스 느낌이랄까. 아니면, 우등 고속버스보다 조금 우월한 정도랄까.  가는 길에 휴게소도 들르고, 국경을 넘기 위해 두 번 정차하는 시간을 포함해 다섯 시간 반쯤 걸렸고, 돌아올 때는 주말 정체로 인해 여섯 시간쯤 걸렸다.




싱가포르에 대한 코멘트를 간단히 남기자면, 도시의 연속, 고층빌딩의 연속, 물가는 너무 비싸고, 쇼핑몰 안에선 오래 느끼지 못한 럭셔리한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싱가포르의 문제가 아닌, 최근 들어 내내 도심 한복판에 속해 있어 도시 울렁증을 겪고 있는 나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혼잡 그 자체인 쇼핑몰 안의 공립 도서관에 머문 시간은 이틀 간의 여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쾌적하고 가장 나다운 시간이었다. 센토사 섬이 눈앞에 가득 들어오고, 섬을 오가는 익스프레스 열차와 케이블카를 즐길 수 있어 공부하는 듯 놀 만한 곳이다. 고작 한나절 반쯤 여행하면서 도서관에서 두 시간 이상을 보내는 일은 좀 어이없을 수도 있지만 주요 관광지에 면해 있어 여행의 일부가 되기에 충분하다. e북으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골라 읽었는데 우연찮게도 마침 그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하버프런트 공립도서관(HABOURFRONT PUBLIC LIBRARY)은 VIVO CITY 쇼핑몰 3층에 위치한다. 시설이나 환경 면에서 이보다 더 쾌적하고 아름다운 도서관은 찾기 힘들 것 같다.


둘째 날. 머라이언파크에서 물 뿜는 인어사자 동상을 구경하고, 동상과 마리나베이샌즈 호텔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을 사진 찍었다. 장렬하는 햇볕과 소란한 인파는 다소 피곤하게 느껴졌다. 늘 그렇듯 내 사진 하나 남기지 않고 느릿느릿 공원을 산책했다. 공원에 마침 생각지 못한 BEER 트럭이 있어 고민하지 않고 수제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으흠, 고민해야 했었나. 500ml 한 잔에 만 오천 원에 육박한다.


 

그늘 밖은 땡볕, 쪄 죽을 것 같은 날씬데 공원 안, 나무 아래 그늘은 청량한 바람이 내내 불어 상쾌했다. 이곳에서 역시 또 긴 시간을 보냈다. 오가는 사람 구경도 재미나니까. 가는 길에 'RED DOT' 디자인 박물관에 들러 마리나베이샌즈 호텔까지 갔으나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갈 만한 호텔 전망대엔 오르지 않았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를 산책하고 짐 찾으러 숙소로 향했다.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볼 만한 '슈퍼트리 그로브'의 조명 쇼도 보기 위해 애써 기다리지도 않았다. 싱겁기 그지없는 싱가포르 여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싱가포르에 다녀오다, 버스로 국경을 넘다. 그것만으로 다 괜찮은 여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일은 비행기 사고에 늘 긴장하는 나에겐 (그러면서도 자꾸 비행기를 탄다) 편안한 일이었다. 입국 심사와 짐 체크 역시 훨씬 간단하다. 버스를 두 번 타고 내린다. 그 과정도 흥미롭다. 늘 그렇듯 잠은 한숨도 들지 못했다. 밥도 먹고, 커피도 느리게 마시고, e북도 보고, 시험공부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여행은 주말이었고, 월요일과 화요일이 시험 기간이었다.)  


다녀온 다음날은 종일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시험도 겨우 봤다. 역마살은 인생에 플러스인가, 마이너스인가. 역마살을 풀며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차츰 움직이고 있다. 찔끔찔끔 쏘다니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역마살 인간이 살을 풀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로 여겨진다. 수월히 넘나들 매력적인 여행지가 주변에 넘쳐나니까. 싱가포르에 작은 점 하나 찍고 오며 역마살을 살짝 풀었다. 모든 욕망이 그렇듯 역마살도 끝은 없다. 끝도 없이 욕망을 따라가게 된다. 일상과 역마살의 조화를 위해 적절한 사유가 필요하다. 일상과 욕망 사이에서 사유로 균형 잡기. 지혜로운 여행자가 되어 하찮지만 괜찮은 여행을 이어가며 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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