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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May 04. 2023

애주가에게 쿠알라 룸푸르는

살아보기. 외국에서 살아보기. 쿠알라룸푸르 일상.

딱 일주일이 지났고 오늘 처음 말짱하다. 맥주 값이 너무 비싸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칭얼댔더랬는데, 쓰레기를 정리하다 보니 맥주 캔이 수북해 봉지가 터질 지경이다.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다더니, 맥주가 비싸다는 걸 알고 처음에는 금주를 고려하다 그건 좀 어렵겠지 싶어 절주로 방향을 바꿨는데. 웬걸. 더한 집착이 생겨버렸다. 맥주 헌터라도 된 양 싼 맥주를 찾아 시내를 어슬렁거렸다. 조금이라도 싼 맥주가 있으면 들고 갈 수 있는 만큼 사재기를 하기도 했다. 귀하게 여기니 더 맛있다. 서울에서보다 더 먹으면 더 먹었지 결코 덜 먹지는  않았다. 급기야 좀, 질렸다. 오늘 처음 말짱한 이유다.


쿠알라 룸푸르 입성 첫날을 제외하곤 처음 맥주를 거르고, 맑은 정신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미친 듯이 비가 오고 있어 일층 편의점에 맥주 사냥을 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 들지만, 맥주 자체보다 맥주 가격에 더 집착하고 있으므로 패스. 애주가라는 오래된 정체성과 여행지에서만 등장하는 자린고비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적절히 대치중이다. 하루는 애주가에게, 하루는 자린고비에게 주도권을 주면 어떨까. 적정 선에서 적절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때가 오겠지.

    

게으르게도 별다른 공부 없이 이 도시에 흘러들어왔고, 동남아 지역은 맥주가 싸다는 기대는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매일매일 고주망태가 될 줄 알았다. -사실 애주가일 뿐 폭주(暴酒)가는 아니기에 고주망태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숙소 1층 편의점에서 맥주 가격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와인 가격을 봐도 마찬가지다. 320ml Tiger 맥주가 9링깃, 우리 돈으로 2,700원이라니. 500ml 세계맥주 네 캔 만원에서 만천 원 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우리나라는.


술이 쌀 거라는 기대로 상승된 기분은 빛의 속도로 추락했다. 그제야 사실 확인을 해보고 정보를 서치 해보니, 당연한 문화적 배경이 있었다. 말레이시아 국민 60%는 이슬람교도 즉 무슬림이다. 음주를 철저히 금하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말레이시아 자체 브랜드의 주류는 없는 모양이다. 싱가포르 맥주인 Tiger, 덴마크 맥주 Carlsberg 생산 공장이 있으며 그래서인지 Tiger와 Hineken 맥주가 가장 눈에 많이 띈다.

    

2700원의 가격에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Tiger 세 캔을 사며 보다 가성비를 조금이라도 높이는 효율적인 주(酒) 생활을 해보려 소주(참이슬)를 한 병 샀다. 쏘맥을 만들겠다는 계산이었다. 소주를 먹지 않은지 오래지만, 맥주 고물가 스트레스로 인한 잠깐의 판단 미스로 무심코 소주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소주 값도 23링깃, 6900원이나 되는 걸. 가성비에 하나 도움 안 되는 선택이었다. 그럭저럭 첫 밤을 보냈다. 나쁘지 않았다. 비싸서 놀란 마음은 살 때의 마음이고 취해서 좋은 마음은 애주가의 흔한 마음이다.

   



끼니마다 외식을 하면서 맥주를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 역시 가당치 않았다. 메뉴에 주류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너무 비싸다. 4,200원짜리 국수에 곁들인 맥주 한 병 값이 7200원이라니. 페탈링 거리 차이나타운에서 영수증을 받아 들며 향후 식생활의 난관을 예상했다. 이후 점심은 밖에서 술 없이 식사만, 저녁은 맥주와 함께 숙소식으로 해결하고 있으니 적당하게 조율했다고 본다.       




학원 건너편 슈퍼마켓에서 비교적 저렴한 맥주를 찾아냈다. 대부분의 편의점에서 2700원쯤 하는 하이네켄을 세일가 7링깃(2100원)에 판매한다.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그날의 맥주를 사 날랐다. 여분을 쟁여놓기도 했다. 오로지 맥주가격이 궁금해 쓰윽 들어가 본 KLCC역 세븐일레븐에서 11링깃(3300원) 아사히를 8링깃(2400원)에 사 오기도 했다. 사들인 맥주를 열 맞춰 세워놓고 사진을 찍으며 어찌나 뿌듯하던지. 갖지 못하는 것에 더 집착하게 되고 해서는 안 될 일이 더 궁금한 게 인간의 본능인 걸까. 어른에게도 숨어있는 아이 같은 마음인 걸까. 애주가를 아이와 동일시하는 건 과도한 단순화이거나 지나친 합리화겠지.     

 

그러그러한 애착과 집착 속에 서울 못지않게 맥주 캔이 많이 쌓였다. 오늘은 휴식이다. 학원 수업은 어제부터 시작됐고, 오늘은 차분히 복습도 했고 이렇게 글도 쓰고 있다. 애주가의 정체성을 삭혀야 글 쓰는 정체성도 미세하게나마 드러날 수 있다. 취기에 잘 써지던 것도 젊을 때 일이다. 요즘 나의 취기는 졸음을 부를 뿐이다. 이제 일주일, 일상에도 적당히 적응했고, 서울과 비슷한 가격의 2100원 하이네켄에도 비로소 편안해졌다. 더는 맥주 사냥을 하지 않겠다. 애주(愛酒)는 편집(偏執)이 아니니까.




요즘 이곳은 매일 장대비가 내리꽂는다. 애주가는 문득 막걸리가 먹고 싶다. 이곳에서 막걸리를 구할 리 없으니, 쿠알라룸푸르에서 나의 첫 번 째 노스탤지어는 막걸리가 되겠구나. 서울에도 오늘 비가 올 거라는데, 서울 사람, 한국사람 좋겠다. 막걸리에 파전도 먹고. 애주가 벗들에게 부러움을 전한다. 그곳이 천국이라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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