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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Apr 30. 2023

낯선곳의 나는 낯선 내가 되고 그런 나는 안아주기 쉽다

살아보기. 외국에서 살아보기_쿠알라 룸푸르 2일 차

쿠알라 룸푸르 첫날. 해야 할 일들을 꼽아본다. 교통카드 사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영어학원 위치 알아두기, 최고 번화가라는 부킷 빈탕(Bukit Bintang) 가보기, 달러에서 링깃으로 환전하기, 제일 큰 역에 가보기,  비건 식당 알아보기, 술안주 위주로 장보기. 오늘 하루에 다해야 한다기보단, 이삼일 간 적응하며 해봄직한 일들. 미션이 있기에 매사에 신중해진다. 긴장하며 사는 일은 피곤하기도 하지만 뒤늦게 이 나이에 혈기 왕성해지는 일이기도 하기에, 가능하면 즐겨보려 한다.


최고의 여행메이트 딸과 왔더라면 어려울 때마다 딸이 다 해결해 주었을 터라 밋밋한 시작이 됐을 터이고, 남편이나 언니들 혹은 친구들과 왔다면 그 몫은 내 것이 되며 한 배 반이나 두 배쯤의 긴장을 수반한 고강도의 정신노동 주간이 되었을 지도. 며칠간의 적응기간이 지나고 나면 누가 온들 능수능란한 현지 가이드가 되어있지 않을까, 내가 나를 믿어본다.




더위를 심하게 타고, 늘 내놓고 사는 얼굴 외의 신체 모든 부위에 햇빛 알레르기로 인한 피부 발진이 쉽게 돋는 나로선 더운 나라에 머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너무 멀지 않고, 물가 높지 않으며 가성비 좋은 영어학원이 있다는 점들을 고려해 쿠알라 룸푸르를 선택했으나, 이제는 한국 더위도 동남아 여느 도시 못지않다는 경험치도 더운 나라를 과감히 선택하는 데에 한몫을 했다. 두고 온 한국의 5월은 아쉽기 짝이 없지만 곧 덥다, 한국도. KL(쿠알라 룸푸르)의 우기에 기대를 걸어본다. 스콜이 쏟아지면 환호해야지.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현지를 즐길 수 있는 날씨 취향을 가져서 다행이다.


첫 외출이다 보니,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며 짐을 싼다. 가방을 꾸리는 데 30분가량 시간이 들었다. 점점 단출해지겠지. 가방도, 마음도. TO DO LIST를 다시 한번 곱씹으며 묵직한 현관문을 열고 첫발을 딛는다.  




이번 외유의 주 목적인 영어학원을 먼저 찾아가 본다. 처음 걸음이라 조금 헤매서 10분, 익숙해지면 5~6분이면 닿겠다. 멀찌감치 서서 학원 안을 관찰하니 콩닥콩닥, 맘이 설렌다. 이미 등록도 다 하고 왔으니, 쓱 문 열고 들어가 인사라도 전하면 좋으련만 약속 없이 불쑥 들어설 만큼 유연하지 못해서, 정해진 테스트 시간에 맞춰 다음날 가기로 한다. 학원 주위에 식당이 많고 스타벅스도 있고, 주로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듯하다. 종일반 집중 코스를 선택했으니 그럴 수밖에. 달랑 4주에 불과하니, 느긋하게 공부할 순 없다. 주 5일 종일 영어를 쓰다 보면 좀 늘어 있겠지.


다음 할 일은 대중교통 경험하기. 도시와 친해지려면 대중교통에 익숙해져야 한다. 대중교통이 비교적 잘 돼 있다는 것을 알고 온터라 부담이 적다. 도시의 메인 역이라 할 수 있는 KL 센트럴 역을 향한다. 교통카드를 구매하기 전에 먼저 토큰으로 이동해 본다.  다가오는 것보다 지나간 것이 더 좋은 나는, 토큰을 꼭 써보리라 벼르고 왔다.


KLCC(쿠알라 룸푸르 시티 센터) 역 내 기계에서 토큰 사기. 목적지 역을 선택하고 현금 투입. 동전이나 1링깃 지폐만 쓸 수 있다. 동글고 파란 것이 톡, 떨어진다. 가볍고 귀엽다. KL 센트럴 역까지 LRT(경전철)로 다섯 칸 이동했는데 2.4링깃(650원 정도)이니 이 정도면 저렴하다. 짧은 여행이 아닌, 다소 긴 체류일 땐 교통비의 높고 낮음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쿠알라룸푸르에 바로 정이 간다. 출발할 땐 토큰을 개찰구에 터치, 도착해선 저금통 같은 구멍에 쏘옥 넣는다. 집에 돌아갈 때 기념품으로 토큰을 몇 개 들고 갈까 싶은데 환영받으려나.






KL센트럴 역에 도착해 전철, 지하철, 기차 등의 노선을 시간을 들여 구경한다. 서울만큼은 아녀도 꽤나 종류가 많다. 생각한 것보다 더 크고 반짝이는 도시, KL. 첫 휴일엔 기차를 타고 어디든 교외로 나가 볼 궁리를 하며 다음 할 일을 떠올린다. 두고두고 쓸 교통카드 사러 가기.


'nu 센트럴 몰' level 2에 교통카드 '터치앤고' 판매 코너가 있다. 번호표를 뽑고 직원 대면으로 처리하거나 키오스크로 직접 할 수도 있다. 조금 더 기다리더라도 이왕이면 현지인과 접촉하고 싶어 창구 앞에 대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이따금 눈이 마주치며 그들에게서 같은 마음을 읽는다. 긴장과 설렘. 걱정과 기대. 


카드값으로 10링깃을 지불하고 10링 단위로 충전할 수 있다(링깃은 곱하기 300원). 얼마를 쓰게 될지 가늠되지 않고, 또 분실 우려가 늘 있기에 30링깃 정도만 충전한다.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 신중함이 개입된다. 진중해진다. 교통카드 사용법은 다르지 않다. 같은 동작을 하는 데도 하나하나에 새로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낯선 곳에 있으면 낯선 내가 된다. 낯선 나를 내가 먼저 알아주고, 먼저 안아준다. 잘했어, 김보리.


부킷 빈탕에 가려 모노레일을 탔다. '모노레일은 쿠알라룸푸르의 자랑'이라는 말이 있던데, 역시나 손님을 맞으려 방금 청소한 것처럼 깔끔하고 쾌적하다. 신발 벗고 탈 뻔했다. 소문대로 부킷 빈탕은 대형 쇼핑몰이 즐비하고 글로벌한 프랜차이즈 샵들이 줄 잇는다. 쇼핑몰도, 번쩍이는 브랜드 샵도 나의 목적지는 아니다. 도심 제 일의 번화가에 가본다는 것과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본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었다.


일본계 식품점에서 자잘한 안주류를 사고 마침내 카페인이 고파 카페에서 아이스라테를 한 잔 마신다. 케이크 맛집인 듯 대부분 케이크나 마카롱을 곁들이고 있다. 도시 복판의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 넘치게 풍요롭다. 구석진 자리 낡은 건물 테라스에 허술하게 널린 빨래와 여행객이라기보단 노숙인으로 보이는 어느 이의 짐꾸러미가 눈에 꾹 박힌다. '살아가고 있음'은 이런 것들이 말해준다.




무료 운행하는 순환버스가 있다. 'GOKL'. 그린, 퍼플, 블루, 레드, 오렌지, 다섯 노선이 있다. 말레이시안 마켓인 'KK슈퍼마트'에서 한국 컵라면을 사고 나오니 버스가 서있길래 냉큼 올라탔다. 잘못 탔다. 오늘의 첫 '잘못한 일'이나 잘한 일이 너무 많아 귀엽게 느껴질 만큼 나 자신에게 관대해졌다. 잘못 탄 이유를 명확히 분석했으니 내일부터는 야무지게 타게 될 것이다. 같은 실수를 또 한데도 웃어줄 만큼 내내 나에게 관대할 것 같다. 무료 버스는 뚜벅이 여행자에겐 최고. 한국에 가져가고 싶네. 


숙소 인근 지하철 역인 KLCC 역 CU에서 종갓집김치와 과자를 하나 사고, 숙소 1층 편의점에서 Tiger 맥주 3캔과 참이슬 한 병을 사서 퇴근한다. 출근 기분은 안 드는데 나름의 할 일을 하나 둘 뽀개고 돌아오는 길은 퇴근인 것처럼 고단하고 뿌듯하다. 320ml 맥주 한 캔이 2700원, 소주 한 병이 6900원쯤 해서 저때부터 놀란 마음은 아직까지 놀라고 있는 중이다. 비싸서 안 먹거나, 아니면 더 귀하게 아끼며 먹을 듯하다.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는 말레이시아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슬림 국가인지라 술이 턱없이 비싸다. 그걸 와서야 알았다. 여느 동남아 국가처럼 원 없이 맥주를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다. 미리 알았다면 다른 나라로 방향을 틀었을까. 그래도 왔겠지. 모르고 왔기에 맘 편히 올 수 있었겠지.  




씻고 나오니 비가 쏟아진다. 쏟아진단 말로는 부족하다. '비 장대가 땅을 쳐 때린다'고 말할 만큼 거세다. 첫 비다. 첫 스콜이다. 바라던 그 장면이다. 적당한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맘에 쏙 들었던 방이지만 비가 오니 창가에 앉는다. 눕힌 캐리어에 테이블 매트를 깔고 술상을 차렸다. 눈에 또렷이 보이는 빗줄기 덕에 경쾌한 줄무늬 밤이 된다. 속이 뻥 뚫린다.


첫밤에 첫날을 돌아본다. 해야 할 일을 제법 많이 해내고 돌아왔다. 기계보다는 사람과 대면하며 일을 처리하려 했다. 묻지 않고 해결하려 애썼다. 영어가 안 통하는 나라에 왔다고 가정하고, 적당히 헤매며 찾아다녔다. 길이 구분이 안 가 차를 막고 걸어도, 기사님은 환히 웃어주셨다. 그 웃음이 계속 따라온다. 오늘 못한 환전은 내일 해야지. 멍하고 맹하게 살지 않을 수 있어 좋다. 똑같은 하루를 쓰는 방식은 이렇게나 다르다. 고작 하루지만 많이 익숙해진 느낌에 키가 커진 것 같다. 이러다 큰코다치지. 내 코가 크긴 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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