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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Apr 29. 2023

쿠알라룸푸르 1일_설렘+긴장=invigorating

제주도를 자주 다니며 비행 공포가 줄었다. 쿠알라룸푸르까지 여섯 시간 반쯤, 적어도 공포스럽지는 않은 평온한 비행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술을 마시는 게 싫어 애주가임에도 비행기에서 술을 마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자는 나를 잘 아는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여 와인을 거푸 두 잔 마셨으나 역시나 단 1초도 잠들진 못했다. 나의 잠은 당최, 어디 숨어 있는가. 


오래간만에 기내식을 접하니 먹는 것도 카메라에 담는 것도 즐거웠다. 비건 메뉴로도 주문하면 좋았을 텐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스크림까지 챙겨주는 친절은 고맙지만 대개는 아이스크림은 사절. 너무 단 맛은 다소 공격적으로 느껴진다. 비행 중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는 자다가 죽을 까봐. 나의 죽음을 자각하지 못할 까봐. 죽음을 감지하는 일이라고 즐거울까. 내가 봐도 좀, 어이없다.   


삼분의 이 쯤은 전자책을 읽고, 나머지 시간엔 미리 다운로드해 둔 넷플릭스 드라마('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보고. 드디어 KLIA(Kuala Lumpur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짐 찾는 곳을 공항 직원이 피켓을 들고 알려준다. 참, 아날로그 하구나. 버스를 타고 입국심사장까지 간다. 짐을 먼저 찾는 거라 생각하다, 잠시 당황했다. 행여 길을 잃을까, 팽팽하게 긴장한다. 하마터면 다시 출국하러 'departure' 쪽으로 갈 뻔했다.


겁이 많으면서도 용감하게 돌아다니는 편이고, 겁이 많은데도 게을러서 미리 공부해오지 않는 편이다. 그러니 뒷목이 뻣뻣해질 만큼 세게 긴장하며 길을 짚어갈 수밖에. 입국심사대 직원은 대여섯 개쯤 질문을 던진다. 

'왜 왔니, 여행 왔니, 공부할 거라고? 학교는 정했어? 학원? 어느 학원이야, 증명할 자료가 있어? 누가 초대한 거야? 직접 네가 찾아서 등록했다고?' 등등. 

딸이 미리 알려준 덕에 미리 준비해 둔 학원 등록 서류와 영수증을 제시했다. 어디에 머물지 주소도 명확했고, 또박또박 질문에 잘 대답했다. 무사통과가 당연한 일이겠지만 입국장을 쓱 지날 땐 어깨에 뭉친 피로 덩어리가 툭 떨어지며 없던 기운이 솟아난다. 


새로운 것은 설레고, 낯선 것은 두렵다. 두 가지의 감정이 마구 뒤섞여 심장은 바운스, 바운스. 문득 떠오르는 단어는 invigorating ~ , '활기를 북돋아주는'..... 시들 나이에 이런 류의 설렘과 긴장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떠나서 좋은 건, 그거. 설렘 그리고 긴장. 하향 곡선을 그리는 같던 피의 흐름이 역주행한다. 혈액이 상승하며 기세도 업, 업, 업!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방법은 네댓 가지. 공항버스, 익스프레스 전철, 그랩, 택시, 공항택시. 가장 비싸고 가장 안전한 공항택시를 선택했다. 쫄보라 자청하지만, 첫 발을 내딛는 일은 쫄보가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긴장되고 어려운 일인지라 가장 맘 놓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공항택시는 공항 카운터에서 목적지를 알리고 계산까지 미리 완료하면 직원이 택시까지 안내해 주고 짐도 옮겨준다. 지나고 나니 '그냥 그랩 할걸' 싶을 만큼 가격이 높은 편이지만, 여행의 첫 발을 안전하게 계획해 와야 떠나오기 전 마음이 편안해진다. 도착 시간이 심야면 더구나 그렇다. 마음 탁 놓고 숙소까지 잘 왔다.

 

*공항택시 비용 ; 120RM (링깃) - 곱하기 300원을 하면 36,000원 정도

만약 그랩을 탔다면 65RM + 통행료 15RM = 80RM, 우리 돈으로 24,000원 정도

도착 시간이 워낙 늦어 공항버스나 공항 익스프레스는 처음부터 고려치 않았다. 공항버스는 편도 15RM, 익스프레스는 편도 55RM.


55분쯤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길이 좋다. 늦은 시간이라 막힐 일도 없었겠지만, 신호 한 번 없이 쭉 달려왔다. 기사님은 승차 시 몇 마디 건넨 것 외엔 일절 말이 없으시니, 그 역시 마음 편하다. 흐르는 풍경이나 감상하면 그뿐, 빌딩의 밀도가 높아지며 도심에 이르렀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데 호텔 입구와 프런트는 몇몇이 모여 있어 으슥하진 않다. 


간절하게 맥주가 고프나 숙소 1층의 편의점은 문을 닫았고, 가까운 편의점은 10분 이상 가야 한단다. 짐을 푸는 내내 고민했다. 다녀올까, 말까. 주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밤길을 걷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라 판단하고, 인천공항서 사온 먹다 만 빵조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는 널찍하고 쾌적하다. 적당한 책상과 의자가 있는 것에 무엇보다 만족한다. KLCC(쿠알라 룸푸르 City Center) 시내 한복판인 것 치고는 가성비가 괜찮다. 일단 일주일만 여기서 묶고 좀 더 저렴한 숙소를 찾아보려 한다.


(2년 전 제주 여행처럼) 유배하러 온 것도 아니지만 호강하러 온 건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실은 또 다른 유배스런 한 달을 꿈꾸고 있는 것도 같다.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나를 향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사람과의 대면에 충실하기보다는 내면에 집중하는 살이가 됐으면 좋겠다. 살아보기, 외국에서 살아보기, 외국에서 공부하며 살아보기, 내향형 여행, 생활여행인 혹은 여행생활인이 되어보기. 밖으로는 아끼고 쪼이며, 안으로는 나에게 후한 사람으로 살아보기로 맘을 단단히 먹으며 도톰하고 까슬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는다. 좋은 꿈 꾸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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