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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Oct 01. 2023

미끄러졌지만 행복했어 - 열흘 간 딸과의 책 만들기

불량주부 김보리의 기웃기웃 문화수집기 8 - 우수출펀콘텐츠 공모전 응모

자랑하고 싶은 실패담이 있다. 실패가 자랑이 될 리야 있겠냐마는 과정이 충만해 자랑하지 않곤 못 배기겠다. 기분 좋은 텐션과 부족함 없는 교감과 진작 폐기된 줄 알았던 열정 혹은 패기라는 것이 고개 든 시간이었다. 열흘 간 책을 꾸리는 것이 가능할까. 정확히 말하면 13일 만에 책을 꾸렸다. 출간된 것은 아니니 정확히 말하자면 책의 형태를 갖춘 책 유사품을 꾸렸다 해야겠지. ‘책을 만들었다’가 아닌 ‘딸과 함께 했다’에 포커스를 두고 싶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주최하는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사업에 도전해 보면 어떠냐는 지인의 권유를 들었을 때는 응모 마감이 불과 보름 앞이었다. 책을 내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음에도 계기가 생기니 또 무모한 도전을 서슴없이 감행했다. 마침 딸과 내가 공유할 만한 콘텐츠가 있었다. 내가 글을 쓰고 딸이 사진과 편집 및 전체적인 진행을 맡으면 될 만한 작업.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딸은 학교 전시 행사 때 ‘메트로놈’이란 별명을 하사 받을 만큼 시간 운영을 잘하는 딸이니 촉박한 일정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공통적으로 애정을 쏟고 있으며 그러한 애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시어머니 ‘이을순’ 여사에 관해서라면 짧은 기간이어도 책이 될 수 있을 만큼 소소한 기록이 쌓여 있었다. 같이 살지는 않으나 한 달, 두 달 오래 지켜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그녀의 그녀 다움, ‘을순’의 을순다움을 글과 사진으로 디테일하게 수집해 두었으니까. 엉뚱하고 기발하고 합리적이며 관대한 이을순 여사는 꼰대의 반대라 부를 만하고, 책이 될 만한 면면을 갖추고 있다. 작은 세계 안에서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노인'이나 '어르신'으로 두루뭉술 뭉뚱그리기엔 아까운 면이 있고, 딸과 나는 그것을 얼렁뚱땅 책으로 엮기로 합의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한 번의 갈등도 없이 책을 지을 수 있었고 그 기간은 아마도 딸보다는 나에게 더 큰 기쁨이었으리라. 딸은 시작부터 명쾌하게 일정을 잡았고 나 역시 한 치의 반항도 없이 그에 따랐다.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아침이고 없이 우리는 수시로 자료를 주고받았고, 좀 더 자주 만났으며, 평소의 열 배 가까운 대화 속엔 잘 하지 않던 비판과 칭찬이 이어졌다. 이름난 강사에게 인디자인 과정을 수료한 건 나지만 책의 형태를 잡아간 건 스스로 인디자인을 깨친 딸이었다. 나의 글과 딸의 디자인, 철저하게 분업이 이루어지니 부딪힐 일이 없었다.

    

‘을순 시간여행’, ‘을순 일상 수집기’, ‘을순 사물 여행’ 등 제목을 두고도 고민은 있었으나 쉽게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을순이니까 을순하지’. 개성 넘치는 그녀의 이름을 앞에 세우고, 이름만큼이나 구별되는 개별적인 고유한 노년을 살고 있음을 내세우고 싶었다. 을순이니까 ‘을순 하는’ 것이고, 김보리니까 ‘보리’ 답게 사는 것처럼, 누구든 각자 다른 이름과 다른 일상을 살아가며 개인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꼼꼼히 지켜보면 촘촘히 다른 노년의 살이. 손녀와 며느리는 꽤 오래 지켜보았고, 지켜본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을순의 아들, 딸보다 사랑은 덜하겠지만 애정의 방식만큼은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한다.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쉬우면서 가장 든든한 사랑의 방식이니까. 우리 역시 그 '지켜봄'에 기대 자라왔으니까.      





실패 결과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퇴고를 시작했다. 결과에 개의치 않고 어떤 경로로든 꼭 책으로 출고하기로 응모하기 전에 미리 약속했더랬다. 잠깐의 고민도 없이 의기투합했던 시작의 마음과 이견 없이 서로 존중하며 엮어간 열흘 남짓의 시간, 같은 대상을 향한 길고 오랜 사랑을 기억하려는 의지를 한 곳에 모아두기. 그 결과를 그녀 ‘이을순’에게 전하고 싶었고 그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출간을 위한 행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는 지금껏 책다운 책이 되지는 못했다. 다른 고민에 사로잡혀 살기도 했고, 그보다는 어느 순간부터 책의 주인공 '이을순'과 나 사이에 예전과 다른 장막이 끼어있음이 더 큰 이유임을 고백해야겠다. 전과 다르게 나는 그녀에게 뾰로통해 있고, 그녀와 이별할 그날까지 을순 수집을 이어가기로 했던 그때의 결심을 지금은 보류하고 있다. 애정을 보류한 채 애정을 가득 담은 책을 낼 수는 없기에 출판 계획 역시 보류 중이다. 회복될 여지가 있으니 여전히 책이 될 수 있는 책인 듯 책 아닌 책 같은 그것, ‘을순이니까 을순하지’. 

     



누적된 관찰과 수집, 기록 덕에 보름도 안 돼서 뚝딱뚝딱 책의 꼴을 갖출 수 있었다. 질과 상관없이 어쨌든 책이 되었으니, 책 짓는 일에 무엇이 선행돼야 하는지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었다. 묵묵히 쓰고 찍고 기록하는 일이 습관처럼 일상에 깔려 있어야만 어떤 계기를 만날 때 무리 없이 책이 될 수 있음을 체득한 것. 결과와 상관없는 값진 교훈이었다. 


무엇보다 딸과 내가 함께 한 작업이어서 더 좋았다. 중요한 건 ‘딸과 나’였다. 이을순보다 ‘우리’였다. 딸과 함께, 딸이 함께여서 찬란했던 열흘이었다. 읽고 쓰고 카메라를 들고 기록을 소홀히 하지 않길 잘했다. 이제는 딸이 더 바빠져 함께 할 새로운 일을 기약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소중한 실패담.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함께 실패했으면. 그때까지 나는 똑같이 읽고 쓰고 카메라를 들어야지. 그나저나,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응모전이 내년 2월에 다시 있을 텐데, 뭐 새로운 콘텐츠 없을까. 혼자라도 도전해봐야 하나. 딸아, 많이 바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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