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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Oct 05. 2023

여긴 그냥 먹으러 다녔지 - '요알못'의 요리 수업

불량주부 김보리의 기웃기웃 문화수집기 10


요리 수업에 가는 친구의 태도는 결연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 하는 친구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요리 수업에 등록했다. 여덟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큰 식탁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그릇 하나, 꽃 하나 괜한 것이 없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테이블 세팅과 그에 적합한 우아한 중년의 여인들이 둘러앉아 있고 그중에 내가 제일 시시해 보이기도 한다.


친구는 그런 자리에 앉고 싶었나 보다. 그런 마음을 가질 자격이 친구는 충분하다. 사는 내내 고군분투했고, 그제야 비로소 여유에 안착했다. 먹는 일을 사랑하고, 가족을 먹이는 일에 충실했으며, 가정 경제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온 그녀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고 나는 그녀의 덤처럼 앉아있다.      




시연을 보며 직접 따라 하는 것이 아닌, 조리 과정을 지켜보고, 미리 나눠준 레시피에 꼭 필요한 조리 팁을 메모하며 조리법을 익힌다. 재료를 미리 맞춤하게 준비해 놓고 보조 선생님과 척척 박자를 맞추며 적당한 시간에 요리를 완성하는 과정은 한 편의 짧은 연극과도 같다. 기승전결의 구성이 있고, 클라이맥스가 있으며 사이사이 긴장을 풀어주는 간질간질한 농담이 있다. 이따금 때 없이 끼어드는 간섭을 선생님은 가차 없이 대하기도 해 잠깐 냉랭해지기도 하지만, 이내 누군가의 애드리브로 긴장이 풀어지기도 한다. 요리에 일자무식인 나는 무식에 근거한 유머로 특히나 간장 해소제 역할을 자주 했다.      


두어 시간 후면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디쉬,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구성된 한 상이 차려진다. 8인을 위한 너 댓 종류의 요리를 순식간에 차려내는 요리 선생님은 내 기준에서 보면 신의 경지다. 남편의 회사를 도우러 출근하기 전까지 2년 이상을 참석했다. 2주에 한 번씩 있던 수업이니 한 달에 열 개 이상, 전체 기간으로 따지면 이백 개가 넘는 요리 레시피를 배웠을 텐데 실제 내가 집에서 밥상에 올린 요리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갈비찜, 닭볶음탕, 무스비 김밥 등, 뭐 그 정도.      


해산물 오일 스파게티를 해달라는 딸의 청을 들어주는 데엔 1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우리 애들은 중식당에 가면 짜사이에 환장해 미안할 만큼 여러 번 추가해서 먹는다. 요리학원에서의 가장 큰 소득이라면 짜사이 무침 레시피를 알게 된 것이다. 요리 재료를 사갈 수도 있는데 어느 날 짜사이를 너 댓 봉지 사가는 나를 보며 다들 의아해하길래

“짜사이 김장 하려고요~!”

농담을 날렸다. 아이들은 몇 날 며칠 질리도록 짜사이를 먹었다. 먹으러만 다닌 요리 교실이지만 이때만큼은 나도 셰프.     

부족함이 많은, 요리 잘 알지 못하는 ‘요알못’ 주부였지만, 친구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 교양과 우아의 자리를 함께 누렸다. 먹는 게 그리 중요한 지 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 옆의 사람이 중요하다 하면 그저 그냥 계속 그 옆에 앉아 있겠다. 먹는 것보다 마음 기우는 일이 아직은 내게 너무 많으니까.      




나이에 적합한 교양과 우아함을 갖추려는 여자들의 욕망은 재력과 명예욕을 향한 남자들의 욕심보다는 덜 과격하다(이런 이분법은 위험하지만, 내 주위 중년의 남성 · 여성을 살짝 평균해 보면 뭉뚝하게나마 이렇게 결론짓게 된다). 과도한 치장이나 상대적 우월감을 위한 무한 질주가 아닌, 시기에 걸맞은 적당한 수준의 지식과 지혜를 갖추려는 노력의 하나 정도로 요리 교실을 활용하면 좋을 듯하다. 가족을 먹이는 일에만 집중해 온 나를 위한 성대한 상(賞) 혹은 밥상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요리 선생님은 청담동에 퓨전 오마카세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가격이 어마어마해 가볼 리 없다만 혹시나 친구가 욕망한다면 슬쩍 따라가게 되려나. 그 자리에 앉아도 될 만큼 뭐든 고군분투하며 일궈놔야겠다. 화려한 만찬에 숟가락 드는 게 부끄럽지 않게. 여전히 나는 좋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보다는 곁에 앉아 함께 먹고 나누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니까.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 좋은 반찬이 되고 술안주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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