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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Sep 29. 2023

17학번 친구가 생겼잖아 - 동네책방 독서 모임

불량주부 김보리의 기웃기웃 문화수집기 7 - 동네책방

동네책방을 좋아하는 마음은, 좋아함을 넘어 응원하는 마음은 남은 나의 생을 응원하는 것과도 같다. 이제는 집에서 10분 거리 안에 두어 개의 책방이 생겼지만, 30여 분 거리에 동네책방이 생긴 걸 알고는 반가운 마음에 지체 없이 달려가던 때가 있었다. 순식간에 책을 고른 탓에 ‘책방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음에도 그리 긴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눈웃음이 순하고 말투가 빠르면서도 서글서글한, 열 살쯤 어림 직한 그녀가 첫눈에 좋았다. ‘책방주인은 하나같이 도도하다’는 편견을 단박에 깨 주던 그녀였다. (그 도도함을 나는 또 동경하기도 하니, 부정적인 시각은 절대 아니다. 지적이고 단정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 후 새 책은 무조건 그곳, ‘노란 별빛책방’에서. 원래도 동네책방 책 구매를 선호하는 나였으니 당연히 그곳은 나의 단골 책방이 되었다. 고등학교 지리 교사에서 책방 주인이 된 그녀, 평범한 사정일 리 없다. 그녀의 아픈 자리를 넘겨 짐작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책모임이 시작되었다. 책을 읽기 위해 굳이 모임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책방 응원 차원에서, 그녀 응원 차원에서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 모임은 4년여의 시간을 지나 지금껏 이어지고 있고, 나는 그녀를 여전히 ‘책친구 1호’라 부르고 있다. 다 늦게 책 친구를 만났고 어울리지 않게 책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토론이 아닌 낭독의 자리라는 것은 독서 모임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 대개는 책방 쥔장이 고심해 책을 고르고 이따금 참여자들이 책을 추천하기도 한다. 모임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쥔장과 나와 내 또래 멤버 K 셋이 떠난 합천 여행은 지금 떠올려도 따스하다. K는 자신의 고향인 합천에 대해 자주 얘기했다.  책방 쥔장과 합천이 궁금했고, 미처 친해지기도 전에 우리는 여행에 의기투합했다.




일박 이 일이라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볼거리도 먹거리도 충분했다. 책 친구끼리의 여행답게 어디서나 책이 함께 했다. 가는 길엔 대구 동네책방 ‘읽다익다’에 들려 쥔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 중 읽고 싶은 책을 하나씩 샀다. 물욕이 앞서 세 권이나 담았다. 헤르만 헤세의 ‘밤의 사색’,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을 걷는 게 좋다’,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책을 고르는 취향이 본인과 비슷하다는 주인장의 말이 칭찬처럼 들렸다. 노란별빛책방 주인장은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합천 사람 K는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을 샀다.


폐사지를 좋아하는 나는 영암사지 절터를 일정에 넣었다. 절터의 옛 돌에 앉아 책을 읽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워 셔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정작 나는 책을 몇 장 넘기지도 못했으나 지금까지도 손에 꼽을 만큼 두고두고 아끼는 장면이다. 책 모임 멤버들과 폐사지 책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이후에도 몇 번 기획했으나 실천하지는 못했다.      




황강 모래사장에 진홍빛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어디에서든 책을 펴는 일이 어색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 점이 참 좋다며 이번 여행의 효용성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술을 먹다가도 책을 읽었고 자기 전에도 책을 읽으며 술이 좀 올랐을 땐 여느 때 같으면 꺼내지 않았을 얘기를 꺼내 같이 울기도 했다(주범은 나였다). 그 후로는 그들과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없는 걸 보면 조금 서먹한 동행과의 여행이 주는 특별함이 그 순간에 분명 작용했던 것 같다.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엔 길 가던 중 우연히 발견한 폐교에서 한참 놀았다. 11월이었고, 늦가을 볕이 억새밭에 빛 샤워하듯 쏟아지고 있었다. 복도의 낡은 마루 틈을 뚫고 자라난 생명은 제법 큰 나무로 맹렬히 자라고 있고, 군데군데 회색 벽에 낀 곰팡이도 그림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글을 쓰고 싶다 했고, 책방 쥔장은 책방 겸 갤러리를 열고 싶다 했으며, 합천 사람 K는 타샤 투더처럼 꽃밭을 가꾸고 싶다 했다. 주저함 없이 인근 공인중개사 사무소에 가서 폐교를 매입할 수 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묻던 두 여인의 적극성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폐교에 이미 주인이 있다 해 아쉽게 돌아섰는데, 만약 매입이 가능했다면 우리는 폐교를 합천의 문화 사랑방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버려두긴 정말 아까운 공간이었는데.






 

독서모임은 멤버를 조금씩 바꿔가며 잘 운영되고 있다. 나 역시 그 어떤 스케줄보다 독서모임을 우선순위에 두고 빠지지 않고 참여하려 애쓰고 있다. 초기 멤버라는 데서 오는 책임감도 있고, 무엇보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쥔장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다. 동네책방 운영이 얼마나 어려운 지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다. 그 사정을 알기에 대형 책방처럼 할인받기 어렵고 택배로 편하게 책을 받을 수 없어도 우리는 가능하면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려 애쓴다. 동네에 작은 책방 하나 있고 없고는 분명히 다르니까. 동네책방은 마을의 문화적 지평을 넓힐 수 있는 DNA를 분명 가지고 있으니까.     

들고 나는 멤버 중에는 성우 뺨치는 목소리로 낭독 시간을 황홀하게 해주는 이도 있었고, 아이티 계열 회사에 오래 몸담고 있어 책 편식이 심해 조금 말랑한 책을 읽고 싶어서 오는 ‘부’ 부장님도 있었고 (성이 부 씨), 다양한 책 추천으로 독서모임의 폭을 넓혀주던 중학교 국어선생님, 용인 외곽에서 먼 길 운전해 오가던 명랑한 두 이웃 간이 있었으며, 꽤 오래 여자 멤버들 사이의 유일한 남성으로 전혀 뜻밖의 견해를 보여주기도 해 자극이 되었던 고등학교 상담 선생님도 있다. 혼자 책 읽기보다 모임 독서가 나은 점은 단연 그런 점일 것이다. 다양하게 읽을 수 있고, 편협하지 않게 시선을 열어준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독서 멤버는 대학 휴학 중이면서 음악 비평을 하고 있는 17학번 ‘희필’님.

     

나이 차이는 계산해 보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아들 뻘, 못해도 조카 뻘. 문화적 세대 차이를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은 모임의 중장년 멤버가 젊어서가 아니라 음악을 포함한 그의 취향의 폭이 워낙 넓은 덕이다. 정태춘, 박은옥에 열광하고, 부모님과 조용필 콘서트를 보게 되어 너무 신난다고 말하는 17학번, 90년대 학번 우리들보다 우리 시대 노래를 더 잘 알고 있는 17학번,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너무 좋다고 말하는 17학번. 문학과 음악, 예술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 독서모임의 지평을 그는 한결 넓혀 주었다. 시대를 가리지 않는 그의 박식함에 먼저 놀라고, 그의 나이를 떠올리며 두 번 놀란다. 노래나 영화 등에 관한 잡식이 또래보다 조금 많은 나는 내가 아는 것을 그가 알아 동의해 주고 보완해주기도 할 때 뿌듯함을 느

낀다.     


그가 추천한 책 ‘초원서점 믹스테잎’(초사장)은 ‘희필’의 취향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충분히 그 다운 책이었다. 큐알코드로 음악을 듣고 영상을 함께 보는 시간, 음악에 관한 각자의 추억과 각자의 우상을 꺼내 수다를 이어가던 시간이 유쾌해 낭독은 뒷전이 되었다. 혼자 읽는 일보다 같이 읽는 일이 즐겁다는 생각은 사실은 잘하지 않는 편인데, 함께 읽는 일의 짜릿한 감동을 그날만큼은 충분히 느꼈다. 연말 안부를 남기고 새해 인사를 희필과 주고받으며 나이와 학번에 상관없이 친구가 되었다는 생각, 취향을 나누고 더 높은 취향의 단계로 건너가는 데 도움이 되는 관계는 ‘친구’보다는 ‘벗’에 가깝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취향이 없는 삶은 관계가 없는 삶보다 더 고독하다. 취향을 나누며 같은 쪽을 보는 벗이 한 둘 있어 관계를 이어가며 살아간다면 외로움은 줄고 고독은 이따금 단 맛이 난다. 그런 면에서 동네책방은 단연코 마을의 문화적 거점이자 달콤한 고독의 거점이 될 만한 곳이다. 대형 서점처럼 10% 할인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건 그저 책 친구라는 벗, 달달한 고독을 위한 귀한 투자라고 생각하자. 20학번 친구라도 생기면, 혹은 100 살의 친구라도 생기면 내 삶의 지평도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니 요만큼도 아깝지 않다. 내가 누군가의 그런 벗이 된다면 그 역시 내 삶의 자긍심을 올릴 만한 일이다. 몇 번을 가늠해 봐도 10 프로 그 이상의 가치, 동네책방에 가는 일 그리고 책 친구를 만드는 일. 오후엔 책방에나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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