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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Sep 26. 2023

글자가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지

불량주부 김보리의 기웃기웃 문화수집기 5 - 캘리그래피



배워온 일 중에 좀 더 이어가지 못해 아쉬운 것 하나를 꼽으라 한다면 캘리그래피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계속했다면 아마도 제법 잘할 수 있는 일이었고 좀 더 오래 했음직한, 지금까지 하고 있어도 좋을 만한 일인데. ' 그랬어, 왜 하다 말았어.' 나를 채근해 본다.   




형편이 어렵다던 남편 회사 일을 돕겠다고 매일 출근을 이어가던 중, 관심 밖의 지루한 업무가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꼈다. 남편에게 투덜대봐야 서로 속만 상할 일인 줄 알기에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낯설고 새로운 일. 새로운 호기심이 밀고 들어와 근심과 우울의 자리가 좁아지는 일. 이건 어떨까. 사부작사부작, 또박또박, 글자 써보기.

    

캘리그래피 공방은 회사 근처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었나 두 번이었나, 세 번은 아니었을 텐데.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이전의 원데이 클래스에서 한지에 붓으로 쓰는 수업을 들은 적은 있으나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언제 해도 늘 지루하던 학창 시절의 서예 수업과는 확실하게 구별될 클래스를 원했고, 잉크에 펜촉을 콕콕 찍어 쓰는 ‘딥펜’ 캘리 수업은 새로운 흥미를 돋우었다.




동그란 홈이 있는 지점까지 펜촉을 담가 잉크를 충분히 머금는 일, 그 잉크가 다할 때까지 써 내려가다 마른 글씨가 나오면 다시 잉크에 펜을 담그는 일을 반복한다. 카트리지에 잉크를 충전해서 쓰는 만년필보다 느리고 레트로 해서 좀 더 낭만적인 글자 쓰기로 다가온다. 구멍의 홈에 머금은 잉크가 서서히 흘러나올 수 있도록 각도와 강도를 조절하며 섬세하고 느리게, 종이에 글자를 앉힌다. ‘적다’, ‘쓰다’ 보다는 내려앉는다고 말하고 싶다. 펜이 종이에게 속삭이는 건지, 종이가 펜에게 귀엣말을 하는 건지. 다정하고 궁금한 소리가 보드랍게 사각거린다.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이 미스터 다아시에게 책상 맡에 앉아 편지 쓰는 장면이 내 멋대로 상상되고, 버지니아 울프가 의식의 흐름대로 ‘자기만의 방’을 쓰고 있을 법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더니, 내가 잡은 펜 끝은 여리기만 해서 간질간질 속닥속닥 무른 얘기만 한다. 잘 쓰고 못 쓰고는 중요하지 않다. 글자와 내가 느리게 시간 속에 녹아들었다면 그걸로 됐다.     



소음이 잠든 깊은 밤, 고독하게 홀로 앉아 딥펜을 놀린다면 그때에 비로소 글자가 내려앉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샥 샥 샤샤 샥. 눈이 내려앉는 소리, ‘먼 데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닮았다. 덧대진 고뇌가, 덧없는 고독이 종이에 내려앉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시를 반복해서 적는다. 읽고 적고, 적고 또 읽는다.


바느질과도 같다. 무념무상, 무심하게 같은 것을 반복한다. 고뇌의 날은 서서히 무뎌진다. 우울도 둔해진다. 효과가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 고뇌와 우울은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인지라 어두운 자아를 벗 삼아 살아갈 수밖에 없다(성격이 팔자라는 말이 그래서 있는 건가 싶기도). 그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응급처치가 필요하다. 바늘 한 땀과 글자 하나는 더디지만, 살아보니 알겠더라. 느린 것들이 오래간다. 빠르게 스쳐간 것들은 상실감을 남긴다. 느리게 온 것들은 다가온 속도만큼 여운을 길게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고 또 그 여운을 떠올리며 바늘을 들거나 펜을 잡을 수 있다.    

    



사람에 기댈 수 있다면 더 좋을까, 덜 좋을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이길 자주 바랬다. 그러지 못한 사람이라 주위의 다정한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가까운 사람을 이따금 외롭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겠는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그렇게 생겨먹어 이렇게 버텨온 것을. 김용택의 ‘울다 들어온 너에게’와 ‘환장’을,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를, 기형도의 ‘엄마 걱정’을,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를, 그러다 나의 되지도 않는 헛소리(같지만 시 같기도 한) 몇 줄을 펜촉에 잉크 찍어 쓰고 또 쓸 때에 그나마 근근이 버텨지는 것을. 그런 나를 정 없다고 해야 할까. 깎쟁이라 해야 할까. 당신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힘든 당신 삶에 나까지 어둠 되지 않으려 그러느라 그렇게 버티며 애쓴 거라고. 그냥 맘 넓게 받아 주세요.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고 싶은 마음도 이따금 든다. ‘정식’이란 단어가 멋쩍다만, 내 아버지가 일생 공 들인 일이고 기댄 일이기에 그런 ‘정식’의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붓을 잡는 일은 불끈하게 서는 일 같다. 올곧게 버티는 일 같다. 아버지를 닮는 일 같다. 손끝을 야무지게 하고 어깨에 힘을 빼고 물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듯 한 자 한 자 먹이 종이에 스미는 일은 무거움을 가볍게 하고 가벼움을 무겁게 하는 수양처럼 느껴진다. 서예학원에 등록해야 할까. 

“아이고, 넌 아직도 배우냐?” 

누군가 또 묻겠지. 아직 새로운 난관에 직면한 것도 아닌데, 해법을 미리 찾아놓은 셈이다.     


오늘밤 펜촉에 잉크 묻혀 시 같은 시시한 글 몇 줄을 끄적여 봐야겠다. 사각사각 샤아 각. 글자가 종이에 내려앉는 소리를 듣다 보면 마음도 고요해져서 괜한 욕심도 내려앉을 테니까. 순하고 무구한 그 소리, 그대도 꼭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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