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k 록 Jun 08. 2019

11. 그때의 나라면 지금의 베를린이 더 좋았을까?

후회해도 소용없는 절대 돌이킬 수 없는 게 있다

첫 유럽 여행에서 별명은 wow girl이었다

어제 꽤 늦은 밤까지 와인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술기운이 올라 훅하고 처음 유럽 여행을 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wow girl이었다.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신대륙을 발견한 듯이 내가 밟고 있는 땅부터 숨 쉬고 있는 공기까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온몸으로 감탄을 표현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도 길거리에 놓인 휴지통만 봐도 신기했다. 하루는 블루베리를 먹으며 강을 바라보는데 우연히 독일 할아버지가 시간을 물어봤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같이 커피를 마시게 되었고 할아버지는 대화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신기한다는 걸 알아냈다. 할아버지는 그런 내가 신기했는지 자신이 사는 마을 이야기를 해주었다. 할아버지가 체리 나무를 말할 때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런 나무가 있느냐고 펄쩍 뛰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도 체리 하면 나는 싸구려 생크림 케이크에 올라간 수입품 캔 체리만 먹어봐서 체리가 맛없는 과일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체리가 나무에서 나는 줄은 상상도 생각도 못 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시골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나는 엄청난 의심을 고서도 그보다 더 강렬하게 끌다. 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가족과 함께한 이틀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틀을 포함해서 나는 두 달의 유럽 여행 동안 하루하루 행복해하며 웃으며 잠들었다. 가끔은 너무 완벽하게 행복해서 꿈이 아닌가 의심할 때도 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행복만 했던 적은 지금까지도 없다.


체리나무에서 딴 체리 & 호수에서 수영해요
25시간 버스를 타도 힘들지 않아

두 달간 유럽에서 지내는 매일 너무 좋았기 때문에 힘들지도 않았다. 3주를 계획하고 들어와서 덜컥 비행기를 연장해버린 이유도 유럽이 마냥 좋았기 때문이다. 계획보다 길게 있게 된 유럽에서 나는 돈을 처절하게 아껴야 했다. 프랑크푸르트 호스텔에서 일주일 동안 무료 파스타만 먹으며 하루에 점심으로 젤라또를 먹으며 1유로만 쓰면서도, 비싼 기차나 비행기 대신 저렴한 버스로만 이동하면서도 힘들기보다 즐거웠다. 몸이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냥 유럽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유럽에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5시간 버스를 타고 갔던 바르셀로나처럼, 힘든 걸 견디면 바르셀로나의 눈부신 바다와 해변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내 마음에 유럽이라는 환상이 담기기 시작했다.  


너-무 좋아!

너-무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았다. 영화에 빠지면 한동안은 영화 속에 빠져 살았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먹보인 내가 밥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책만 읽었다. 그런데 스무 살이 넘어가자 점차 주변에 것들이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영화를 봐도 예전처럼 빠져있지 못했고 책을 읽어도 다음 할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친구한테 왜 지금은 영화를 보고 바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한탄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시시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좋아하는 게 점차 그냥 좋은 게 되어버리고 있었다. 감정이 무뎌지는 게 싫었다. 그 무렵 만난 유럽은 나를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타이밍도 좋았을 테지.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으로 목이 타고 있었는데 다시 시시하지 않은 너-무 좋아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한 거다.


2015년 여름 독일에서는 지금과 다르게 내 얼굴 사진이 많다!


후회란 시간이 엇갈렸다고 느낀 감정이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부터 차곡히 쌓은 내 환상을 4년이 흐르고 나서야 드디어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만큼 좋지가 않다. 이상하다. 너-무 좋았던 유럽인데 오기 전부터 덤덤하기만 하다. 아니, 오히려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때의 나라면 지금의 베를린이 더 좋았을까?

Rok 록 Youtube <베를린에서 먹고 살기 그리고 자연의 소리�>

영상에 담았듯이 베를린에서는 항상 자연이 가까이 있다. 높은 빌딩 대신 나무와 하늘이 보이고 새소리에 눈을 뜨며 걷다가도 잠시 멈춰 서면 언제든 자연을 만날 수 있다. 나무도 새도 바람도 공기도 내 곁에서 언제나 느낄 수 있다. wow girl이었던 그때 나라면 지금 이 상황에 들떠 훨씬 더 즐기면서 감사할 텐데! 실제 지금을 살아가는 나는 그렇지 못하다. 문득 그때의 나라면 어땠을까 상상을 했다. 그때의 나라면 지금 보이는 모든 풍경에 놀라고 감탄하며 에너지 넘치게 더 돌아다닐 텐데. 그때의 나라면 베를린 파티에 왔다는 사실에 너무 즐거워 밝은 에너지로 모든 사람과 대화를 했을 텐데. 그때의 나와 비교해보니 더욱 뚜렷하게 지금의 내가 주어진 상황을 즐기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기만 했다. 이럴 거면 그때의 나에게 지금을 주고 싶었다.  

 

2015년 베를린
2019년 베를린


절대 돌이킬 수 없는 게 있다


<안 본 눈 사요>라는 말이 있다. 살 수 없지만 살 수 있다면 안 본 눈을 사고 싶을 만큼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딱 한 번뿐이다. 한번 경험하면 돌이킬 수 없다. 경험이란 이미 해 버린 것. 그래서 좋든 싫든 이미 알아버린 것. 그때의 나는 체리나무도 모를 만큼 모르는 세상이 넓었고 유럽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비행기를 연장할 만큼 무모하게 행동했다. 그렇게 4년이 흐른 지금은 더 많이 경험했고 더 많은 걸 알아버렸다. 더 이상 체리나무 따위에 감탄스럽지도 기분이 내키는 대로 더 머물거나 떠나지도 않는다. 그 시절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 안 본 눈은 살 수 없으니까.


베를린 공원


그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갇히는 게 후회다. 지금 알아버린 걸 후회하고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걸 후회하고. 그때와 지금은 엄연히 만날 수 없는 시간인데 후회하면 뭐하랴! 나도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후회로 시작했다. 그때의 나라면 더 좋았을 베를린이라며. 근데 그렇지 않다. 경험이 쌓여 시시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나만의 어른이 될 수 있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감탄하는 대신 감상할 수 있고 무모 대신 준비할 수 있다. 그때를 떠올리며 후회 대신 밝았던 에너지를 떠올리고 행복했던 만남을 추억하자! 후회 좀 하면 어떤가, 오늘을 살 수 있는 긍정적인 힘만 쏙 얻고 다시 돌아오면 지!


이전 10화 10. 독일어 배워서 뭐하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