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k 록 May 25. 2019

9. 독일 마트에서 위로받는 이유

우울하거든 나가서 천 원이라도 쓰고 오렴!

소비란 무엇인가

대학교 시절, 나에게 아주 짧게 스쳐갔지만 공부만 열심히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기간에는 한 달에 10만 원을 쓸 정도로 공부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방학이 되어서도 학기 중 습관이 남아 가만히 집에 있거나 학교 도서관을 기웃거렸다. 매일 옆에서 지켜보던 언니는 내가 우울해 보였는지


우울하거든 나가서 1000원이라도 쓰고 와라!

라고 말했다. 언니 말대로 나는 당장 편의점으로 달려가 초콜릿 우유를 샀다. 950원이던가? 천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었는데도 쓰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오히려 비싼 걸 샀더라면 부담스러워 온전히 기분이 좋아지기 어려울 것 같은데 1000원은 부담 없이 쓰기에 꽤 괜찮은 금액이다. 우울함을 안고 온 베를린에서 문득 언니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비건 음식점을 찾아다녔지만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소비가 아닌 다른 종류의 소비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사진도 찍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그런 소비를 하고 싶었다.


마트로 향하는 내 발걸음

그렇다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것은 아니기에 마음 놓고 펑펑 쓸 수는 없었다. 우울함을 덮으려 더 큰 우울함을 불러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사고 싶은 물건을 눈으로만 담고 마트를 공략하기로 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기왕이면 맛있는 걸 먹고 건강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돈을 쓸 때 죄책감도 덜 들었다. 실제로 마트 구경을 좋아해서 이곳저곳 가보니 스트레스도 줄고 독일 마트는 집 구하는 와중에 오아시스 존재 같은 걸 몸소 느꼈다!


독일 마트가 좋은 이유 3가지 

저렴한 가격

독일은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에 서비스를 받는 건 대체로 비싸다. 반면에 마트 물가는 저렴한 편이다. 한국에서도 유기농 마트, 대형마트, 슈퍼마켓 등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독일에도 다양한 마트가 있다. 그렇지만 가장 비싸다는 비건 마트나 유기농 마트도 한국의 유기농 물가보다는 저렴하다. 집 앞 초록마을을 구경하는 게 취미였던 나는 구경 후 손에는 그나마 저렴한 배즙 하나 달랑 들고 나왔다. 한 입에 쭉 빨면 텅 빈 봉지가 얼마나 허무하던지! 독일에서 우울함을 핑계 삼아 유기농 제품 쇼핑을 해도 그렇게 부담 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Lidl Edeka Rewe Penny 등 일반 마트에서 주로 장을 본다

유로가 아직도 달러인 줄 착각하고 있어서 큰일이다. 1유로는 약 1300원인데 아직도 1유로를 1000원으로 계산하고 있다. 하루에 두 번씩 장을 볼 때도 있고 거의 매일 장을 보고 있는데 평균 10유로 정도 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10유로어치를 사면 하루 만에 다 먹고 없다. 그래도 세 끼니를 10유로에 해결한다면 나름 저렴하다고 생각한다. 초반에는 식당에서 주로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 먹고 카페에서도 음료 한잔과 디저트까지 즐기곤 했는데 이렇게 하니 평균 식사 비용 10유로 정도에 카페에서는 6유로 정도가 나와 하루 식비만 30유로를 쓰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그냥 돌아다니며 펑펑 썼다가 지금은 요리도 배울 겸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외식과 균형을 찾고 있는 중이다. 요리도 아직 익숙지 않아 초반에 또 다른 의미로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나름 마트에서 Bio(유기농) 제품을 고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도 이제 유기농을 살 수 있다는 마음 한 편의 뿌듯함이 온달까.

 

우유 대체 식품인 두유와 아몬드 밀크 등 종류가 다양하다
후무스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으로 완제품 후무스가 다양해서 좋다
도넛은 빵보다는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바로 지나치지는 못한다

처음 보는 식품인데 바게트가 겉에 그려져 있길래 구입해보았다. 가격도 너무나 저렴해서 새로 시도하는데 전혀 부담이 없었는데 포장지를 까서 냄새를 맡는 순간, 흡!

코코넛 워터와 다양한 주스

다양하고 색다른 상품

중국에서 거주할 당시 유럽에 꽤나 오래 살았던 친구를 알게 되었다. 친구는 남자 친구가 중국에 놀러 왔을 때 그래놀라를 왕창 주고 갔다며 두 봉지를 시원하게 선사했다. 중국에서 구입하려면 만원이 훌쩍 넘고 한국에서도 비슷한 가격이었는데 유럽에서는 2000-4000원 정도로 훨씬 저렴하고 종류도 다양하다. 


애증의 그래놀라 과자

다양한 식품 카테고리 중 채소와 과일이 빠질 수 없다. 식품 회사에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과 다른 종류의 채소와 과일은 더 신기하다. 아무래도 무역이 발달되어 쉽게 다른 나라에서 나고 자란 것을 먹을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본토에서 먹는 게 더 신선하고 다양한 것 같다!

생선과 고기가 병에 들어있다

생선과 고기가 통조림처럼 되어 있는 식품을 발견했는데 용기를 내지 못하고 시도하지 않았다.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아야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비릿할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

귀여운 게 최고야, 미니 누뗄라!

인도에서 처음 맛본 버터밀크는 밥과 함께 먹기도 하고 후식으로 마시기도 했다. 그걸 독일 마트에서 발견할 줄이야. 반가웠다. 누텔라가 아주 조그마한 용기에 담겨 있었는데 한 통을 사면 멈추지 못하고 다 먹어버리는 나에게 아주 다행스러운 상품이라고 생각하고 담아보았다.


윤리적 소비가 가능한 상품!

비건 제품을 쉽게 찾을 수 있는 화장품 코너

비건 제품은 독일 마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유나 치즈 대체 식품인 비건 식품 외에도 다양한 비건 화장품이 있다. 독일에서는 비건 화장품을 어디서든 찾을 수 있고 각종 불필요한 화학 약품을 첨가하지 않거나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은 화장품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상품들은 소비자가 윤리적 소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 소비를 하는 건 반대로 우울하지 않게 소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윤리적인 소비에 한 발 다가설 수 있도록 다양한 비건 제품이 진열되어있는 마트 물품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놓인다.


독일 베를린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사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마트는 매일 간다. 마켓에서 마트에서 나는 오늘도 우울함을 떨치고 위로를 받는다. 단순히 물건을 산다는 행위보다 나를 포함해 지구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소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 게 아닐까? 

이전 08화 8. 베를린에서도 먹고살기 바빠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