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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 록 Jun 01. 2019

10. 독일어 배워서 뭐하나

중국어는 쓸모라도 있지

독일 대신 중국

독일에 오고 싶다고 생각을 한 건 처음 독일 땅을 밟은 순간부터였다. 2015년 여름에 유럽 여행을 하면서 많은 나라 중 꼭 한 번 독일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4년간 생각만 했다. 독일어를 배울 엄두도 안 나고 의지도 없었다. 짧게 적은 <갑자기 웬 중국?> https://brunch.co.kr/@srk1630/127 에서도 밝혔듯이 난 독일어를 배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오래 공부한 축에 속하는 영어도 책상에 앉아 열심히 하기보다 콘텐츠를 보며 자연스럽게 익힌 편이라 언어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독일어는 현실적으로 배워도 잘할 것 같지 않았고 하기 싫었다. 그러다 중국 여행을 가게 되었고 획기적으로 변한 중국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중국 문화와 경제에 흥미가 생긴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중국에 빠져들었다. 중국어는 세계에서 많이 쓰는 언어고 알아두면 이리저리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부르는 독일을 뒤로하고 현실적인 중국을 선택하였다. 그렇게 나는 중국어를 6개월 간 배웠다.  


베를린에서는 영어로만 살 수 있다는 착각 

그런데 중국을 거치고 여러 나라를 돌고 돌아 결국 독일에 왔다. 오기 전까지도 독일어는 할 생각이 없었다. 독일에 가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독일어를 배울 생각이 없다니, 쯔쯔쯔. 평소 생각은 그랬지만 지치고 자존감이 떨어진 나는 배울 의지도 생각도 없었다. 베를린도 그래서 선택한 도시였다. 베를린은 국제 도시기도 하고 절반이 외국인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외국인의 거주 비율이 높은 도시다. 그래서 나는 다른 도시보다 베를린에 왔다. 돈과 시간에 항상 쫓기던 나는 독일어 학원을 다닐 돈도 아까웠고 새로운 언어를 다시 처음부터 익혀야 하는 시간도 부담스러웠다. 빨리 일을 구해서 돈도 벌고 독일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었다. 독일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일을 구하고 독일에서 살 기회를 얻으려면 독일어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방을 구하며 방황을 실컷 하고 나서 독일에 살고 싶으면 독일어가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였다. 독일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학원에 등록했다.

악명 높은 독일어는 배우기 싫다고요!

독일어 학원을 등록하자 독일 친구는 격려해줬다. 딱 독일 친구들만. 7년 동안 독일어를 배우고 있는 프랑스 친구는 아직도 독일어가 어렵다고 했고 4년 동안 베를린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이탈리아 친구는 독일어는 평생 잘하긴 글렀다고 했다. 그래, 그게 바로 내가 독일어를 피한 이유였다고! 마음 깊숙이 하기 싫은 독일어라도 내가 독일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독일에 살고 있고 매일 독일어를 마주하니 해야지, 별 수 있나!


독일어의 쓸모 

 베를린에는 유명한 빵집이 있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온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북적인다. 사람들이 항상 줄을 길게 서서 빵을 기다리는 Zeit Für Brot. 나는 /제잍 펄 브롯/이라고 읽고 다녔다. 


제잍 펄 브롯 맛있어! 먹어봐!


Zeit에서 ei는 영어로 /에이/ 발음이 나지만 독일어로는 /아이/ 발음이 난다. 독일어는 영어와 같은 알파벳을 사용하지만 발음이 다른 경우가 있어서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다. 지하철 역 이름도 읽지 못해 어버버 할 때가 많았다. 대충 f로 시작하는 역이라고 기억하고 짐작으로 가거나 캡처해서 알파벳 하나하나 비교하며 이동해야 했다.  

 항상 줄이 긴 Zeit Für Brot


그런데 독일어를 배우고 이제 역 이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글을 배우고 신기해서 지나가는 간판을 읽듯이 나는 요즘 지하철을 타며 지나가는 역 이름을 소리 없이 읽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가끔 웃기도 한다. 그래도 이제 겨우 철자를 읽을 뿐이지 자기소개를 제외하고는 말은 못 한다고 보면 된다. 중국어를 배울 때보다 아주 실망스러운 선생님도 그렇지만 제일 큰 문제는 독일어가 빨리 늘고 싶은 욕심에 비해 공부를 안 하는 나에게 있다. 수업을 듣고 집안일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영어로 대화하며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있다. 독일어 복습은 하루에서 멀어져 가고 단어가 둥둥 떠다니기만 한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고 아직은 어린 독일 아이보다 못한 독일어 수준을 가지고 마트에 갔다. 


요즘 빠진 고구마 튀김
감자튀김 옆에 한 두 종류씩 있는 고구마튀김

감자튀김도 좋아하지만 워낙 고구마를 좋아해서 고구마튀김을 발견하고는 줄곳 고구마튀김만 먹고 있다. 마트마다 감자튀김은 냉동 제품이 다양하고 많은 거에 비해 고구마튀김은 생각보다 별로 없다. 처음 유기농 식품점 Bio Company에서 고구마튀김을 발견하고 Süßkartoffeln으로 표기한다는 걸 알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고구마라는 뜻이어서 그 뒤로 마트에 갈 때마다 Süßkartoffeln을 찾았다. 정확히 철자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고 감자튀김을 찾으면 옆에 고구마튀김이 한 두 종류씩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대강 s로 시작한다는 것만 알고 가격을 확인하면 된다. 그런데 어제 간 마트는 대형 마트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마튀김이 보이질 않았다. 감자튀김은 종류가 많았는데 어찌 된 일인가 싶어서 몇 바퀴를 돌았는데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점원에서 물어보았다.


Ich möchte sweet Pommes suchst?


주어마다 동사가 변하고 문법도 아직 제대로 배우지 않아 내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그냥 나오는 대로 말을 꺼낸 말은 난장판이었다. <나는 스윗 감자튀김을 찾는 싶어요. 찾아요?> 점원은 영어를 하지 못해서 나는 독일어로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라는 걸 강조해야 했다. 근데 도무지 고구마가 독일어로 생각나지 않는 거다. 그래서 sweet Pommes 달콤한 감자튀김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우기다가 감자튀김을 권하는 점원에게 다시 스윗을 강조했다. 물론 달콤하다는 말도 독일어로 모른다. 그러다가 용케 Süßkartoffeln에서 Süß가 생각났다. 그래서 <쥬스- 쥬스-> 거렸다. 그랬더니 친절한 점원은 알아듣고 이내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뭐라 뭐라 독일어로 말했다. 그리고는 텅 빈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다 팔렸다는 말이구나! 고맙다는 말 하나는 잘 익혀서 나는 <당크, 빌렌 당크!> 하면서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세 군데 마트를 돌고 돌아 마음에 드는 고구마튀김을 구입했다. 


쓸모 있고 없고는 내가 결정한다

독일어를 배우면서도 이걸 왜 배우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독일에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는 현실에서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게 숨 막힐 때도 있었다. 그래서 영어를 떠올려봤다. 내가 영어가 쓸모 있을 거로 생각해서 좋아했는지 생각하니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영국과 미국 콘텐츠를 좋아했다. 팝송도 외우고 드라마도 즐겨보고 영화에는 빠져 살았다. 그런데 중국어는 달랐다. 중국어는 쓸모 때문에 공부했다. 중국 콘텐츠를 좋아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중국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독일어는? 많은 사람이 독일어로 된 콘텐츠는 재미없다고 인정한다. 나 또한 재미있는 콘텐츠를 아직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중국어만큼 많은 사람이 사용하지도 않는다.


영어권 나라의 문화 콘텐츠는 알게 모르게 내 생각을 상당 부분 이루고 있고 영어로 된 정보 또한 내 시야를 확장해주었을 거다. 중국 사람들은 어디든 많아 우연히 중국어를 쓸모 있게 사용하고 있다. 치앙마이 옆자리에 앉은 중국인과 대화도 하고 베를린에서 알게 된 중국 친구와 중국 음식을 먹으며 집에 초대받아 놀기도 한다. 내 떠듬떠듬한 중국어도 중국어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나를 살갑게 대해준다.

 

재미로 공부한 영어도 기회가 엿보여 공부한 중국어도 살기 위해 공부하는 독일어도 다 각기 쓸모가 있다. 


쓸모는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쓸모가 없어도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다. 그러니 즐겁게 배우고 익혀서 쓸모를 만들어 나가면 된다. 쓸모없는 건 없다.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게 있을 뿐! 


당신은 어떤 쓸모를 만들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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