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표에서 물음표로
한국인이라는 편견
해외에서 한국인을 피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해외에 간다고 하면 다들 하는 말이 있다. <한국인은 꼭 피해라> 여러 카더라 소식과 직접 한국인한테 당한 경험담이 더해지면서 <해외에서 한국인이 한국인 등쳐먹는다>는 명제는 참으로 결론지어간다. 베를린도 터키, 일본, 베트남, 한국 등 다양한 커뮤니티가 서로 끈끈하게 뭉쳐있다. 여기서 만난 일본인 친구는 일본인을 일부로 피해서 만나지 않는다고 하고 인도네시아 친구도 그렇다고 말하니 국제적으로 해외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사기 치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에 도착하면 집을 구하는 문제부터 생존에 직결된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 투성인데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현지 사정을 잘 모르니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이때 먼저 정착한 같은 국적 사람을 만나면 같은 언어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믿음이 가게 되고 그가 하는 말은 나도 모르게 엄청난 진리인 것처럼 따르게 된다. 암흑 같은 상황에 한 줄기 동아줄 같다고나 할까. 문제는 썩은 동아줄일 경우지만!
또 다른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한국인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사용하게 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할 기회가 줄어든다. 그래서 해외까지 나와서! 굳이! 한국인을 만난다는 게 상황과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들게 하기도 한다. 특히나 어학을 위해 해외 생활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더욱 민감한 문제기도 하다. 그들이 빠르게 어학이 늘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할 때면 <한국인은 만나지 않았어요> 조건이 자주 언급된 것도 같다. 그러니 반대로 <한국인을 만나면 어학이 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해외까지 왔는데 한국인을 사귀면 그 후 한국인 친구들만 만나게 될 것 같고 해외 속 조그마한 한국 사회에 갇혀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처음에는 독일어로 꿈을 꾸는 경지까지 가고 싶다는 소망과 의지를 품지만 한국인을 만나면 이내 한국어의 편안함에 타협할 것만 같다. 그렇데 된다면 해외에 왜 나왔나 자괴감이 들게 될 거라는 두려움, 그런 마음이 한국인을 피해야 한다는 명제에 힘을 실어준다.
이 두 가지 이유에서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여행하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나쁜 사람은 종종 만났다. 그중에는 한국인도 있었고 외국인도 있었다. 그런데 좋지 않은 경험은 좋은 경험보다 편견을 강력하게 만들어 낸다. 좋았던 기억보다 당했던 기억이 한국인은 경계 대상이라고 상기시키게 했다. 중국으로 갈 때도 독일로 올 때도 한국인보다 현지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한다는 다짐을 마음속에 완전 무장시켜두었다. 중국에 갔으니 독일에 갔으니 현지인을 많이 만나 교류하는 건 중요하고 소중한 경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인을 피해야 한다는 다짐이 필요한 것이었을까.
편견을 넘어서는 방법
피해야 할 이유를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마음과 다르게 실제 행동은 달랐다. 아, 모순적인 나란 사람이여! 베를린에 도착하고 일주일이 지난 후 우연히 한국에서 온 언니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호기심 많은 모순적인 사람이니 한국 언니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당시에는 고작 두 명의 한국인을 만난 게 전부임에도 한국 사람들과 놀기만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지 지나치게 과장해 상상하면서 두려워하기도 했다. 집을 구하면서 안정기가 찾아오고 5월부터는 어학원을 등록하였는데 처음 교실을 들어서자마자 한국인이 많아서 또 한 번 당황했다. 처음에는 한국말이 들리는 게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반 언니가 한국 음식을 해준다며 반 친구들을 초대했다. 친구들과 매일같이 만나 친해진 상태라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그렇게 베를린에서 다양한 한국인들과 만날 기회가 점차 늘고 있었다.
약 2개월 반이 지난 베를린 생활을 돌아보면 외국인 친구와 보낸 시간보다 한국인 친구와 보낸 시간이 더 많다. 그런데 우려했던 것처럼 한국인 사회에 갇혔다는 느낌이나 해외에 나와 실패한 생활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편견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이제 더 이상 편견이 아니다. 편견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인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더 이상 치우 져있지 않으니까. 그런데 편견을 깨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편견이라는 생각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인데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식하기 전까지 편견은 그냥 당연한 사실일 뿐이다. 편견은 단단하고 끈끈해서 쉽게 부서지지도 쉽게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편견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내가 편견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거나 잘못된 편견이라면 고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겨야만 한다. 나에게 <해외에서 한국인은 만나지 마!>라는 단단하게 자리 잡은 편견이 <해외에서 한국인은 만나지 마?>라고 말랑하게 변한 건 상황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하면서 또는 다른 사람한테 들은 소리로 자리 잡은 편견이 중국과 독일에서 조금 길게 머물면서 내가 직접 경험하고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거다. 중국에서는 한국인 커뮤니티를 일부로 피한 경향도 있었다. 고백하건대 중국에서는 편견을 가지고 일부로 피한 경우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중국과 달리 편견을 가진 상태임에도 행동해보기로 선택했다. 한국인을 만나는 행동!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잘 맞는 사람도 잘 맞지 않는 사람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마다 달라요
그렇게 나는 한국인들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피하는 대신 만났다. 그중 몇몇과는 친구가 되어 지내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피할 이유는 없다. 반대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호의적일 필요도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태어난 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보다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하다. 나와 결이 맞으면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건데 편견으로 좁혀진 시야는 나를 한 가지 사항으로 선택하게끔 가두어 버린다. 이제는 한국인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좁은 생각에 갇히지 않고 사람마다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국가 별로 특징이 없는 건 아니다. 아메리카 친구들은 아시아 친구들보다 수업시간에 말을 더 많이 한다는 건 체감상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을 알기 전까지 <해외에서 한국인을 만나지 마>처럼 <이탈리아인은 바람둥이야>라고 단정 지어 버리기엔 개인마다 다르다. 경험하지 않고 생각만으로 판단하게 되면 기회나 인연을 놓칠 수도 있다. 편견이 있다면 편견을 다시 뚫고 나와 경험을 쌓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취향, 생각, 신념을 차곡히 쌓아가면 된다.
그렇게 나만의 기준이 생겨 사람을 좀 더 빨리 알아보는 눈이 생긴 게 핵심이다! 베를린에서 초반에는 무리해서 모든 사람을 다 만나려고 했다. 어디에서 왔든 어떤 일은 하든 일단 궁금했다. 점차 나와 맞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한국인 친구들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베를린 이곳저곳을 다니며 매일 다른 사람들과 신나게 잘 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