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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여니vvv Aug 15. 2024

또 다른 기회

어두워서 발견한 것들




가장 어두운 밤 어딘가에
항상 빛나고 있는
작은 빛이 있다.


빛 중 <조안보리셍코>









  옛날에 내가 살던 동네 어귀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길이 있었다. 그곳은 어느 이름 모를 무속인이 사는 초라한 초가집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낮은 동산을 에둘러 난 길이었다.


  우리 삼 남매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낡은 기와집과 새로 지어 이사해 들어간 갈색 슬래브집은 그곳을 지나야 했으므로,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길을 다녔다.  



  그 길에 들어서기 전에 굴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굴다리는 빛과 어둠을 경계 짓는 지점 같았다. 밤에 그 굴다리를 통과하면, 사람 사는 느낌이 가득했던 길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풀벌레 소리만이 전부인양  적막이 가득한 길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작은 가로등 하나가 힘없이 서서 돌아가는 먼 길의 어둠을 어렴풋 배웅할 뿐이었다.



   가는 길, 가로등 불빛의 빛이 잔잔하게 으스러져 어둠 속에 다 묻혀 버리면 빛 속에 숨어 있던 수풀이 손 내밀 듯 다가왔다. 그것은 때로 침을 꼴깍 삼키게 할 정도로 온몸에 긴장감을 주게 했다. 그 길을 뻔질나게 다니곤 했지만 나는 좀처럼 어둠이 내린 그 길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그 길을 지나는 것이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는 종종 마법 같은 일이 펼쳐지기도 했다. 여름밤이면 그 길 위로 별빛이 흩뿌려진 듯 반딧불이 무리가 유유히 날아다녔다. 나는 그때가 참 좋았다. 그 때에는 두려운 마음을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그 밤이 황홀했다.  







   직장을 관둔 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 직장을 관두기 전 그런 걱정을 했었다. 그리고 나의 걱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나의 상사는 애정을 담아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가보면 알게 될 거야. 그래도 이만한 곳이 없어”


    이만한 곳이라 함은 적지 않은 보수와 때 되면 오르는 직급과 개인 사정이 없는 한 원할 때까지 자리보전이 가능한 안정적인 곳을 뜻하는 말이었다. 안정적인 집단을 벗어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너무나 궁금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사실 퇴직 후의 방황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직장인 외에 내 인생의 직업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나는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갑갑했던 옷을 벗어던진 것 같았던 퇴사의 기쁨은 잠시 뿐, 현실적인 내 상태를 투명하게 마주해야 했던 그 시간을 나는 어둠이라 부르고 싶다.



 

   하지만 양지바르고 평평한 곳에서만 풀이 자라란 법이 있나? 가파르고 단단한 돌 틈에서도 꽃은 얼마든지 핀다. 그리고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전지대를 벗어난 인간은 절실해진다. 왜냐하면?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절벽에서 떨어진 후에야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그토록 흔하게 회자되는 이유는, 우리의 깊은 염원이 자유로운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커다란 고난 앞에서 잘 드러나는 법이라는 걸, 우리는 왜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늦은 방황 중에 나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그러나 나는 종종 나에게 되뇌곤 했다. 이건 길을 찾고 있는 확실한 반증이라고. 나는 전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것 같은 목표나 세상으로부터 세뇌받아 온 열망을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 사이로 조급하고도 우울한 마음이 자주 드리우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날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지원금을 받으며 취업 관련 공부를 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통은 차일피일 미루곤 하던 나인데도 마음이 얼마나 조급했으면 그것을 알게 되자마자 즉시 지원을 했다. 어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마음이 나를 적극적으로 떠밀어 댔다. 그 뒤 나는 6개월 간 성실히 취업 관련 프로그램을 이수했는데, 그 과정이 나에게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어 주었다. 특히 대학생 때도 따지 못했던 회계 관련 자격증을 두 달간 학원을 다니며 2개나 따게 되었는데,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또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학원을 가고 싶어도 갈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공부할 기회가, 그것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내게 온 것이다. 또, 다시 공부를 하고 보니, 학원을 다니던 그 시간이 어찌나 설레고 짜릿하던지, 그동안 나도 알지 못했던 나란 사람의 가능성을 재발견해 낸 것만 같아 기뻤다. 그 후로 나에게는 비교적 뚜렷한 꿈이 하나 생겼는데, 치료사가 되기 위하여 제대로 공부해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원서를 다시 썼고, 이제는 서른여섯 대학생이 되었다.





   십 대의 나는 여름이면 한낮의 열기로 후끈해진 옥상 시멘트 바닥에 누워 밤하늘의 별 보는 걸 취미로 삼았었다. 그러면 괜스레 마음이 뭉클하고 행복해져서 불어오는 바람결에도 감사한 마음이 절로 일곤 했다.


    그리고 집을 가기 위하여 지난 그 길이 잠시나마 무섭지 않았던 이유는, 그 길 위에 반딧불이가 아름답게 날아다녔기 때문이었다.




   만약 밤이 없었다면 나는 그것들을 단 하나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둠에는 그런 기회가 있었다. 신비롭게 뭉클한, 그러나 명료하게 빛나는 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건 전부, 어두웠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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