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이야기 : 구사일생으로 내게 온 아이들
함께 살 인연은 따로 있는 법
2018년 가을에 태어난 보리, 귀리는 나비가 네 번째로 낳은 새끼들이다. 한 달 정도 방에서 어미젖을 먹으며 잘 지내다가, 나비와 함께 갑자기 사라진 뒤 3주 뒤에 아픈 몸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없어질 당시 간신히 눈만 떴지 몸도 못 가누는 상태였던 터라 어린 것들이 초겨울 날씨에 얼어죽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했지만, 몸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안 좋았다. 게다가 한 아이는 아예 볼 수 없었고, 다른 한 아이는 갑자기 떠났다. 그렇게 만든 게 내 불찰 같아서 한동안 마음이 안 좋았다. 만약 살 운명은 뭘 해도 산다는 말이 맞다면 아마 두 아이는 살 운명이었을 거다. 그리고 내겐 너무 아픈 아이들이다.
그날 내가 늦게 퇴근했다면 보리를 만날 수 있었을까? 내가 만약 해지고 나서 집에 왔다면 보리를 발견하지 못했을 테고, 그러면 보리가 자라고 애교떨고 순수디 순한 그 사랑스런 모습을 보며 행복했을 리도 없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 해가 밝은 낮에 집에 갔고, 마당에서 복순이가 앞발로 뭔가를 건드리고 있는 걸 보았다. 뭘 갖고 노나 보다가 회색물체가 보이길래 처음에는 쥐인 줄 았았다. 말려야 하는데 다가가기는 무섭고, 그 갈등 속에 천천히 다가가다 그 회색물체가 아기고양이란 걸 알아채곤 얼른 손으로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고양이는 눈과 코에 누런 딱지가 더덕더덕 붙어 있고 울지도 않았다. 물수건으로 닦아내려고 해도 쉽지 않았고, 왠지 딱지만 떼어낸다고 될 상황이 아닌 것 같아 바로 차를 몰로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25분 정도 달려야 도착하는데, 그동안 이 아이가 살아있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아무 움직임도 없고 소리도 안 나면 죽었나싶어 얼른 코를 대보고, 꿈틀거리는 게 느껴지면 안심하면서 죽지마라 죽지마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외치며 천리 길 같은 병원애 도착했다.
의사선생님이 아기 고양이가 결막염이 매우 심하고 어쩌면 각막염일 수도 있겠다며 약을 처방해주었다. 이런 경우 코가 막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면서, 무엇보다 영양실조라 일단 영양제를 한 대 맞고 오늘밤 잘 지켜보라 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숨을 쉬는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는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살짝 만지면 고개를 약간 들었다 다시 숙이고 곯아떨어졌다. 아무 기척이 없으면 혹시나 불안한 마음에 다시 손을 대보고,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다시 맘을 놓으며 그날 밤을 보냈다.
하룻밤은 넘겼다. 그럼 그 다음은? 출근은 해야 하는데 도저히 이 아이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단순히 어리기만 한 게 아니라 영양실조라니 뭐라도 먹여야 하고 무엇보다 물을 많이 주라는데 그러려면 데리고 출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큰 가방을 찾아내 체온 유지를 위해 담요를 넣고 그 안에 아이를 넣었다. 분유가 없어서 일단 물과 사료를 넣고 직장으로 갔다. 기운이 너무 없는 아이라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자기만 했다.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물을 끓여 사료를 불렸다. 꼼지락 거리면 무릎에 앉혀 입가에 물을 묻히고 불린 사료를 하나씩 넣어주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오물오물 씹어댔다. 무릎 위에서 잠이 들면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렇게 일 주일을 데리고 출퇴근을 했다. 일주일이 다 돼갈 무렵엔 무릎 위에서 내 손가락을 갖고 장난을 쳤다. 가방에 넣으면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을 칠 정도로 기운이 생겼다.
분유를 타서 한 손으로 안고 먹이면 나중엔 두 앞발로 분유통을 붙잡고 먹기 시작했다. 집안에서 제법 생생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하고,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기도 하고 급하면 다리를 붙잡고 어깨까지 한달음에 기어올라왔다. 이름은 보리라 지어주었다.
보리야, 보리야 하고 부르면 처음엔 경계심을 갖고 가만히 있다가 앞발을 X자를 그리며 천천히 다가오다가 나인 걸 알아채면 강아지처럼 뛰어왔다. 누워 있으면 배 위에도 올라오고 얼굴 위에도 올라와 주저앉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있었지만 눈은 매일매일 딱지가 내려앉았다. 누런 딱지는 눈과 코를 자꾸만 뒤덮었다. 약을 넣어주어도 이 증세는 꽤 오래 갔다.
게다가 아기 고양이 보리가 다 큰 또또와 샛별이 틈에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예민하고 경계심이 강한 또또와 샛별이는 그 전에도 몇 번 다른 아기 고양이와 만남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아서, 우주와 달이를 결국 마당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있다.
그런데 보리는 영 건강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비 새끼인 거 같아 나비에게 보여줘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나비는 보리를 잊은 거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보리는 내가 집안에서 데리고 살 수밖에 없었다. 또또와 샛별이가 못살게 굴까봐(몇 번 그랬음으로) 보리 옆에 계속 붙어 있어야 했다.
그렇게 보리를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을 무렵, 나비가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마당으로 왔다.
나비가 데려온 새끼는 분명 몇 주전에 데리고 나간 아기고양이들이다. 갈 때는 네 마리였는데 두 마리만 왔다. 네 마리 중에 온몸이 온통 까만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오지 않았다. 그때 추측하기로 세 마리를 데리고 오던 중에 보리는 마당에서 놓친 거 같다. 복순이가 짖어대고 뛰어다니니 분명 피해오다가 놓친 거 같다. 그리고 나비는 포기한 거 같다.
예전에도 보면 나비가 새끼를 물고 오다가 놓칠 경우, 나비는 다시 새끼에게 가지 않고 떨어져서 새끼가 알아서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게 동물들을 본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픈 새끼나 몸 약한 새끼를 끝까지 데리고 오진 않는 거 같다. 보리는 마당에 떨구어진 채 약한 몸으로 복순이에게 붙잡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비가 데려온 두 마리는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몸집도 꽤 통통했다. 그런데 그 전에 다른 새끼들에 비해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게 온순해서일 거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달아날 기운이 없었던 거 같다.
두 녀석이 안전하도록 1층 방안에 데려다 놓고 나비가 왔다갔다 하면 젖을 물릴 수 있도록 했다. 새끼들은 마당에 나올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조금 뛰어다니며 다른 고양이들과 장난을 치곤 했다. 마당에는 우주, 은하수, 별이, 달이가 있었는데 새끼고양이들과 잘 어울려 놓았다. 아마 자기 형제들인 걸 냄새로 다 아는 걸까? 또또와 샛별이와 달리 나비 새끼들은 자기들끼리 정말 잘 챙겨주며 놀았다.
그런데 마냥 거기서 잘 클 줄 알았던 어느날, 집에 돌아와 보니 몸집도 제일 크고 건강해보였던 아이가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안다. 이미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가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때의 고양이 모습을. 이것저것 따질 겨를도 없이 병원으로 곧장 데려가려고 아이를 안고 우선 2층으로 올라가 수건을 찾았는데, 몸을 감싸기도 전에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 아, 그 작은 아이를 난 또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놀던 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약하고 작은 아이를 왜, 왜...
그 전에 그렇게 갑자기 떠난 새끼 고양이 생각이 나면서, 어쩌면 이 아이들도 전염병일까 싶어 1층에 있는 나머지 한 아이를 찾았다. 겉보기에는 멀쩡해보였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무조건 동물병원으로 달렸다.
병원에서는 지금으로서는 딱히 어디가 아픈지 알 수는 없지만 심장이 매우 약하게 뛰고 있다며 일단 영양제를 밎고 잘 지켜보라고 했다. 그 아이도 보리처럼 결막염이 있다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렇게 귀리가 우리집에 왔다.
귀리는 심장이 약하게 태어났다. 나중에 X-레이를 찍어보니 기형적으로 생겨 자칫 위험할 수 있다고 했는데, 달리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약만 처방해주었다. 귀리는 1년 가까이 약으로 살았다. 보통 1분에 60회 정도 숨쉬는 게 정상이라는데 귀리는 80회를 훌쩍 뛰어넘어 24시간 동물병원에 급히 데려가기도 했다. 검사를 받던 날은 귀리에게 살지 못 살지를 가늠하는 하룻밤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구석에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귀리를 보며 또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었는지 모른다. 제발 제발 저 아이가 건강하게 뛰어다니는 걸 보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무력함과 슬픔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귀리가 일어나 밥을 먹기를, 물을 마시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기적처럼 귀리가 일어나 물을 마셨다. 하루가 걸렸다. 그때의 기쁨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밥 먹는 게, 물 먹는 게 그렇게 고마운 일일 수 있다는 게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 단순한 일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귀리가 아직아작 먹는 것만 봐도 행복하기 그지 없는 더없이 감사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