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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꽃 Mar 12. 2021

우주 두 번째 이야기

너를 기억해


우주는 평화를 생각나게 한다. 봄바람에 꽃잎 하나가 툭 떨어져 살랑살랑 흔들리다 내 손바닥에 사뿐히 내려앉는 느낌처럼, 반항이나 길들여지지 않음, 동물적 본능, 거칠고 울퉁불퉁한 느낌을 찾아볼 수 없는 투명 그릇 속의 맑은 물 같은 아이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발톱을 세우거나 하악거리지 않고, 사람에게도 강아지에게도 서슴치 않고 다가와 안긴 유일한 고양이였다. 그 아이를 안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할 정도로 무한한 신뢰가 무엇인지에 대해 선물하고 갔다.


너를 기억해


비 오는 날, 어미인 나비 입에 물려 내 앞에 나타난 우주는 내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아, 숨 쉬는지 확인하기 위해 우주의 몸에 손바닥을 살짝살짝 대보아야 했다. 또 집에 온 지 열흘이 넘도록 눈을 뜨지 않았다. 언제나 몸을 웅크리고 자다가 나비가 오면 가녀린 몸을 꼼지락거리며 본능적인 몸짓으로 젖을 찾아다녔다. 은하수, 별이, 달이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져 가는 게 보였고, 서로를 쫓고 쫓으며 장난을 쳤지만 우주는 그 자리 그대로 잠만 자고 있었다. 깔고 뭉개고 밀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귀도 덜 자라 조그맣고 눈과 코는 누런 딱지들이 자꾸만 들러붙었다. 눈 딱지 때문에 눈을 못 뜨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어 오염되지 않게 조심스레 떼주었지만 하루 이틀 뒤면 또 딱지가 내려앉았다. 혹시 눈을 못 뜨게 태어난 건 아닐까, 이렇게 계속 놔둬도 되는 걸까, 살 수는 있는 걸까. 시간이 지나도 젖 먹는 거 외에 달리 달라진 게 없자, 우주가 이대로 잠들어버릴까 봐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이상하게도 병원에 데려가는 건 내키지 않은데, 이대로 지켜만 보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놓여있었던 거 같다.

그날도 우주를 안고 눈과 코에 붙은 따지를 떼어주었는데 우주가 코를 킁킁거리고 고개를 내저으며 몸부림을 쳐댔다. 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우주의 눈이 열렸다. 와 눈떴다. 눈 떴어! 우주가 날 본다. 우주랑 나랑 눈이 마주쳤다.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았다. 

그 뒤로도 우주는 몇 번 외눈박이가 되었다가 장님이 되었다가 만화 속 주인공 눈처럼 둥근 반달이 되어 나를 놀라게 했다. 고양이는 귀가 깨끗하고 코가 촉촉해야 건강한 거라던 의사 선생님 말처럼 우주는 항상 콧등이 촉촉했는데, 그건 건강해서가 아니라 매번 감기에 걸려 콧물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걷다가도 훌쩍, 밥 먹다가도 훌쩍, 화장실에서 오줌 누다가도 훌쩍, 장난치다가도 에이치 하며 재채기를 하지만 하루게 다르게 커갔다. 우주는 형누나가 100미터 달리기 할 때 경보하듯이 뒤뚱뒤뚱 그러다 깡총 뛰기도 하고 좌우로 흔들흔들거리면서 쫓아다녔는데 용케 넘어지진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자기 걸음으로, 자기 속도로 형제들을 따라 자라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잠자는 데 썼는데, 그러다 형제들의 레슬링에 붙잡혀 몸이 뒤집히기 일쑤였고, 뛰노는 발길질에 여러 번 두들겨 맞기도 했고, 온몸이 깔리기도 했지만 우주는 꿋꿋하게 다시 잠이 들곤 했다. 

혼자서도 잘해요~


비가 휘몰아치던 어느 여름날, 마당에 있을 아이들이 걱정돼 일찍 조퇴를 한 날이었다. 비 피할 곳은 있었지만 비 오는 날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왠지 비가 한 아이를 데려간 것만 같아서 태풍 같은 빗줄기가 몰아치면 일하면서도 맘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그날 돌아와 나비, 우주, 은하수, 달이, 별이의 이름을 불렀을 때 우주가 나타나지 않았다. 온 마당을 다니며 우주를 불러댔다. 비옷은 끈적거렸고, 냥이들 밥그릇 주변에는 똥파리들이 득실거렸다. 나비와 가을이는 이미 다 자란 아이들이고 가끔은 마실 나갔다 하루 이틀 안 나타날 때도 있어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우주, 은하수, 달이, 별이는 여전히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 거 같은 여린 나무였다. 

어쩌면 나비랑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위안을 가져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창밖을 살피며 작은 소리에도 혹시나 하고 밖을 쳐다보았을 때 복순이 밥그릇 옆에 앉아 있는 우주를 보았다. 

한달음에 달려가 우주를 안고 밥을 주었지만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빗속에 어디 다친 거 아닌지 뭘 잘못 먹은 건 아닌지 살펴보려는데, 우주가 조용히 작은 몸짓으로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복순이 밥그릇이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웃음이 났다. 우주가 복순이 밥을 다 먹은 거였다. 우주는 자기 몸짓의 15배는 될 법한 복순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다른 애들은 얼씬도 않고 복순이 움직임만 느껴도 후다닥 달아나거나 하악 거리며 경계하는데, 우주는 복순이 앞에서 그냥 얼음이 되었다. 처음엔 무서워서였을 거 같은데 나중에는 꼬리털도 안 세우고 그냥 복순이가 하는 대로 그대로 있었다. 복순이도 나중에는 핥아주고 쫓지도 않는다. 그러니 자기 밥을 열심히 먹는 우주를 그대로 놔두었겠지. 우주도 코앞에 있는 복순이를 보고도 여유 있게 식사를 마쳤겠지. 

우주는 나무 위를 다람쥐처럼 잽싸게 오르내렸다. 그때 느꼈다. 우주는 약한 게 아니라 어쩌면 내공이 대단한 아이인지도 모르겠다고 호기심도 많고 겁도 많고 내 옆에서는 금방이라도 잠에 취해 쓰러질 것처럼 연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혼자서 세상을 탐험하고 있었다는 걸. 참으로 다행이다. 우주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자신을 잘 컨트럴 할 줄 아는 아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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