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는 새끼를 낳고, 나는 새끼를 품고.
왜 눈이 온다,라고 하는가
비가 온다,라고 하는가
추운 날
전철에 올라탄 할아버지 품에는 작은 고양이가 안겨 있다
고양이는 이째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할아버지 어깨 위로 올라타고
사람들 구경한다
고양이는 배가 고픈지 울기 시작했는데
울음소리가 컸다
할아버지는 창피한 것 같았다
그때 한 낯선 청년이 주머니에서 부스럭대며 뭔가를 꺼내
작은 고양이에게 먹였다
사람들 모두는 오독오독 뭔가를 잘 먹는 고양이에게
눈길을 가져갔지만 나는 보았다
그 해쓱한 소년이 조용히 사무치다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안으로 녹이는 것을
어느 민족은 가족을 애도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외출할 때 옷깃을 찢어 표시하고
어느 부족은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성기의 끄트머리를 잘라내면서 지구의 맨살을 움켜쥔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심장에 쌓인 눈을 녹이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에 등불을 켠다
[눈물이 온다](이병률 시)
고양이를 부르는 대표 명사 나비. 왜 그런 이름으로 불려졌는지 유래는 모르겠지만, 나도 길냥이를 볼 때마다 나비야, 나비야 하고 부른다. 털 색깔이 어떻든, 몸집이 크든 작든 나비야 하고 부르면 모든 고양이가 친근하고 예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이름은 길가다 우연히 한 번씩만 불려지고 말 이름이라, 김춘수의 <꽃>처럼 실제 그 고양이와 내가 의미 있는 관계가 되는 건 아니다. 나비란 이름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부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할 어떤 대상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가볍게 불려졌던 나비란 이름을, 고유명사처럼 가져가 버린 고양이가 있다.
이사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집 마당을 아무렇지 않게 가로질러가던 고양이를 보고, 평소처럼 나비야 하고 불렀는데, 그 흔하디 흔한 이름으로 특별한 존재가 되어 버린 고양이, 나비는 3년 동안 나에게 14마리의 새끼를 보여주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4년 전, 추석쯤에 앞집에서 탈곡하는 소리가 저녁 늦게까지 요란하게 울려대던 다음날, 나비는 새끼를 물고 우리 집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앞집 할머니 말로는 당신이 먹이 주던 고양이인데 어느 날 우리 집으로 가버렸다며 내심 섭섭함을 표현하셨는데, 나비가 한동안은 앞집과 우리 집을 왔다 갔다 하는 듯하더니 차츰 우리 집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참고로, 시골에서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이유가 쥐를 잡아주기 때문이지, 도시인들이 생각하는 동물 사랑, 그런 건 아니다.)
그렇게 처음 정착한 아이들은 나비와 새끼들인 금둥이, 은둥이였다. 금둥이와 은둥이는 처음에는 경계를 하더니 나중에는 열린 현관문 앞에 앉아 들어오려고도 하고, 앉아서 밥 달라고 울기도 하고, 높은 난간에도 오르락내리락하며 장난을 치곤 했다. 제법 자라 어미인 나비보다 더 커졌을 때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한동안 아침이면 현관문 앞에 앉아 기다리곤 했는데 아마 그게 이별 인사였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금둥이 은둥이가 한겨울을 나고 어디론가 떠나간 후, 봄에 다시 나비가 네 마리 새끼를 데리고 마당으로 왔다. 완전히 까만 고양이, 흰색이 제법 많이 섞이고 눈이 크고 동그란 고양이, 회색 고양이가 둘이었는데 넷이서 뛰어노는 모습이나 햇살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평화롭다는 말이 떠올랐다. 사계절을 함께하며 오래오래 어울려 살라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지어주었다. 나비는 새끼들과 함께 모여 있다가도 나비야, 하고 부르면 이아옹 이아옹 하며 다가와 다리에 볼을 비비고 아는 체를 했지만 새끼들은 경계심이 많아 한 녀석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네 아이가 쑥쑥 자라고 있던 중에 다시 나비가 네 마리 새끼를 낳아 마당으로 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가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시점이었을 거다. 그때 데려온 아이는 둘은 좀 크고, 하나는 그보다는 작고, 나머지 하나는 너무 작아 같은 뱃속에서 같은 때 태어난 아이들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비도 평소와 달리 새끼를 돌보는 모양이 지치고 힘겨워보였다. 이렇게 제각각의 발육상태로 온 아이들에게 우주, 은하수, 별, 달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내게 너무 반짝거리는 아이들이라서.
한동안 마당은 나비와 새끼 8마리, 봄이가 낳은 새끼 3마리까지 총 12마리가 오손도손 살아가는 공간이 되었다. 사료통이 비어지는 건 순식간이었지만 번식하고 성장하는 걸 보는 건 기쁨이었다.
그리고 나비는 또 1년이 되지 않아 6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는 태어나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네 마리가 어미젖을 먹으며 자라게 되었다. 지난번 출산 이후 나비의 몸상태가 안 좋아 보여 중성화 수술을 시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만 때를 놓쳐 또다시 새끼를 배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비는 지난번보다 더 약해 보였다. 새끼 젖을 물리다가 내가 들어가면(지난번 출산부터 두 달 정도는 방 안에서 새끼를 돌보게 했다.) 내 무릎에 올라와 기진맥진한 얼굴로 곯아 떨어지기도 했다. 나비가 살아야 새끼도 살 수 있었기에 내 걱정은 새끼들보다 나비가 먼저였다. 젖을 물리는 모습이 행복해 보여야 하는데 애처롭게만 보였다.
그러다 방문을 열어놓고 일을 보다가 어느 틈엔가 나비가 새끼들을 모두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문이 열렸으니 마당에 있던 애들이 들락날락거리고 말았는데, 본능적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 새 새끼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날은 11월로 접어들고 있던 때라 새끼들 걱정에 한참을 앞집 지붕까지 올라가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 주 뒤, 마당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눈코입이 딱지들로 뒤범벅이 된 채 간신히 숨만 쉬고 있어 한달음에 동물병원에 데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2주 뒤에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나비가 데리고 왔는데 제법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생각했는데 일주일 뒤 한 아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나머지 한 아이만 남았다. 이렇게 지난번 사라졌던 새끼 네 마리 중 두 마리만 살아남아 내 곁에 남게 됐다. 쌍둥이처럼 쏙 빼닮은 털 색깔에 보리, 귀리라고 이름 지어줬는데, 발육상태가 좋지 않고 몸이 약해 마당에 내놓지 못하고 집안에서 키우게 되었다.
나비 주위엔 항상 수고양이가 있다. 외지에서 온 수고양이는 물론이거니와, 나비가 낳은 새끼들 중에 수고양이도 발정이 나면 나비 뒤를 쫓았다. 다행히 은하수 형제들부터는 중성화 수술을 했지만 그 위 애들은 여전히 나를 경계하고 있어 잡아서 병원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나비를 수술시키는 게 급선무였는데 젖 떼면 데려가야지 하다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먼저 임신이 되는 바람에, 또 한 번의 출산을 마치고서야 중성화 수술을 시킬 수 있었다.
나비가 마지막으로 낳은 아이들 이름은 콩이와 수수다. 처음 네 마리를 낳았는데 두 마리만 살아남았다. 마당에 내놓는 것도 불안하고 내가 집안에서 키우기도 어려워 처음으로 입양을 결심했다. 다행히 내 친구가 데려갔는데, 1년 뒤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아기를 낳아본 적도 없는 나는, 이렇게 고양이 나비가 낳은 새끼를 내 자식처럼 돌보는 상황이 되었다. 나비는 그 많은 새끼를 낳고, 중성화 수술 후 이젠 좀 편하게 살 줄 알았는데 말 한마디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새끼들을 내게 남긴 채. 떠나보내는 일도 내게 남긴 채.
나비가 보고 싶다.
아파서 앓다가 떠난 고양이들이 많이 있다. 속수무책으로 그걸 지켜보는 건 고통이다. 땅에 묻고도 아주 오래 가슴이 아프다. 나비가 내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어딘가 살아있을 거라 믿어보기도 한다. 나비 새끼들을 볼 때마다 나비와 나의 인연을 생각해본다. 모르긴 몰라도 꼭 만나야 할 인연이었던 거 같긴 하다. 생명이 탄생하는 경이로움과 본능적이지만 새끼를 아낌없이 돌보는 모성애와 새끼를 잃는 그 많은 시련 속에서도 살아있는 생명에 집중하는 초연한 태도까지, 걱정많은 나에게 나비는 인생의 선배처럼 느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