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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영화관

by 혜랑

1980년대 어느 토요일 밤, 서울시 관악구 신림 2동에 있는 한 집에서 영화관이 열렸다. 큰길에서 오르막길을 150여 미터 올라야 도착할 수 있는 그곳에는 부모님과 살고 있는 오 남매가 있었다. 오늘의 영화는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하는 <스팅>이다. 안방에는 일곱 식구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영화관은 발 디딜 틈 없이 복잡스러웠지만 질서를 지켰다. 흐릿한 형광 조명 아래에서 드디어 영화가 시작됐다.


1930년대 미국이 배경이다. 잘생긴 남자 배우 둘이 주인공인 듯싶은데, 너무 많은 사람이 나와서 누가 누군지 헷갈린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누가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지 헷갈린다. 주인공이 사기를 치려는 건 알겠는데 괜히 응원하게 된다. 잘 생겨서일까? 그러다 한 사람이 배신하게 되고, 결국 두 주인공이 모두 죽고 만다. 응원하던 주인공이 죽으니 그냥 슬펐다. 그런데 이런 반전이 있을까? 알고 보니 배신한 것도, 두 사람이 서로 총을 겨누며 죽는시늉을 한 것 모두 계획이었다. 그들의 친구를 죽였던 사람에게 시원하게 사기 치기 위한 치밀한 작전이었다. 주인공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주인공이 살거나 이기면 된다. 마지막에 주인공 둘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날리던 모습이 얼마나 멋지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중간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물어볼 수도 없을 만큼 영화관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드디어 영화가 끝났다. 우리 가족만의 한밤의 영화도 끝났다. 12시가 조금 넘었다. 어린 동생은 이미 엄마 무릎에 머리를 베고 잠이 들었고, 우리는 부모님께 밤 인사를 드리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너무 재미있어.” 이게 영화평의 전부였지만, 말로 할 수 없는 짜릿함과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팝콘도 음료도 없는 영화관이지만 가장 따뜻했던 우리 가족만의 영화관. 이제 열리지 않지만 <스팅>은 언제나 그 시간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영화를 몰라도, 내용을 다 몰라도 몰입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던 어린 시절의 나로. 감동은 지식에 비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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