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네이버가 대세다. 뭐든 네이버한테 물어보면 원하던 답이건 원하던 답이 아니건 0.5초 안에 즉각 대답을 해준다. 어지간한 질문에 네이버가 망설이는 걸 본 적이 없다. 이 정도면 세상 모든 질문을 다 받을 기세다. 오늘도 나는 네이버한테 물어보았다. ‘말을 예쁘게 하는 여자가 사랑받을까?’ 네이버는 즉각 답변을 내놓았다. ‘YES.’ 그리고 순간 당황한 나에게 한 마디 덧붙인다. ‘인간은 이성보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다.’
여기서 궁금해졌다. 말을 예쁘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누군가 나에게 ‘말을 예쁘게 한다’라고 칭찬했을 때, '예쁘다'는 누구의 기준인가 하는 것이다. ‘예쁘다’에는 기준이 있기 마련인데, ' 예쁘다, 사랑스럽다, 귀엽다, 소중하다 '등의 서술적 표현의 기준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대상이 아니라, 그 기준으로 바라보며 평가하는 객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더 묻고 싶어 진다. 우리는 사실, 마음대로 평가하고 판단한 것을 동의를 구하지 않을 채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지 않나? 물론, 긍정적인 의미의 서술어이긴 하다. 그래서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볼 때 이건 평가되는 대상이 기준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타인의 기준이며 타인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즉, 판단의 기준이 나라는 주체가 아니라 타인이라는 객체에게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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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는 문화 속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좋은 말이란 좋은 뜻을 가진 말이고, 나쁜 말이란 나쁜 뜻을 가진 말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상대에게 하는 말이 좋은 의미이면 좋은 말, 나쁜 의미이면 나쁜 말인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내가 볼 때’ 그가 예쁘면 예쁘다고 말한다. 그게 예뻐 보이는 상대에 대한 칭찬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좋은 의미라고 생각해서 건넨 말이 상대가 원하지 않는 말이라면? 나의 칭찬을 상대가 다른 의미로 해석해버린다면? ‘너 참 예쁘다’라고 말해준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워진다. 나의 칭찬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고 튕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쁘다’라는 서술어에 대한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한다면 상대에게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짚고 가는 것은, 그렇다면 ‘예쁜 말‘이란 어떤 말인가 하는 것이다. 예쁘다+말=예쁜 말. 이 말은 ’ 예쁘게 하는 말‘이란 뜻일 것이다. 이 역시 기준은 예쁘게 말을 하는 그가 아니라 그걸 보고 판단하는 나에게 있다. 즉, 기준은 ’나‘인 것이다. 문제는 사회와 문화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사고하고 판단하는 기준마저 같아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칼 융 ¹ 이 말 한 집단 무의식과 같은 것이다. 동일하게 판단하고 동일하게 사고하는 동일한 기준이 세워진 상태인데, 그래서 ’ 예쁘다 ‘의 기준과 ’ 예쁜 말‘에 대한 기준 역시 이미 세워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기준 안에 있으면 말이 예쁜 것이고, 기준에서 벗어나 있으면 말이 예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예쁜 말을 하는 범주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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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청년 2호는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집과 회사에서의 얼굴이 각기 다르다. 친구들을 만났을 때의 얼굴도 다르다. 집에서 실컷 어리광을 부리다 회사에 가면 천연덕스럽게 회사생활을 잘도 해낸다. 그러다 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텐션은 한없이 올라간다. 청년 2호는 집에서는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다. 때로는 따뜻한 친구처럼 다가온다. 이때의 말투는 다정다감한 연인 같다. 회사에서의 모습은 매섭고 날카롭다. 거기다 노련한 리더의 모습도 나타난다. 회사에서 청년 2호의 말투는 자신 있고 당당하다. 그러다 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전혀 다른 인격이 나타나는데, 주로 말은 짧게, 단박에 맞받아치며, 눈빛이 초롱초롱해져 친구들의 한 마디 한마디 말에 집중한다. 그야말로 트렌디하다. 세 가지 얼굴을 가진 청년 2호는 얼굴마다 각기 다른 말투와 언어스타일을 구사한다. 그중 집에서 다정스럽게 하는 말투는 사랑스럽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말투는 제법 어른 같다. 친구들과 놀 때 사용하는 말투는 가볍기 그지없다. 아직 애인이 없는 청년 2호가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어떤 말투를 사용할지 기대가 된다.
나는 우리 집 청년 2호가 달변은 아니지만 참 말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청년 2호는 자신의 포지션에 따라 패션과 스타일을 달리하듯, 상황에 맞는 말과 말투를 구사할 줄 아는 것이 여간 지혜로워 보이는 게 아니다. 자신이 속해있는 그룹과 그 안에서 자신의 포지션, 그리고 분위기를 잘 이해한다는 의미이고, 그 분위기를 적절히 즐길 줄 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청년 2호는 인생이 즐겁다. 매사에 사려 깊고,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다. 그를 보는 내 마음도 흐뭇하다.
얼마 전 만났던 지인은 스윗하고 차분한 말투가 입에 배어있었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성품이었다. 그래서 그 분과 말을 할 때 부담이 없고 즐거웠다. 말을 조리 있게 하거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는 상대를 차분하게 배려하는 스윗함 때문에 내내 유쾌했다. 그 역시 달변가는 아니지만 말을 잘하는 타입인 것이다. 그가 사랑받는 여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게 그리 중요한가? 내적으로 충만함이 있는 그 안에 이미 사랑이 가득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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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말한다. 말을 예쁘게 하는 여자가 사랑받는다. 이 표현은 틀렸다. 누가 누굴 예쁘다, 안 예쁘다 판단한단 말인가. 우리는 누구나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만하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볼 때 그 존재만으로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 말을 예쁘게 한다 ‘ 역시 틀렸다. 표현의 기준이 말을 하는 ’그‘가 아닌 말을 듣는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기준이 나에게 있는 것은 오랜 공통의 문화 속에 형성된 집단 무의식과 같은 것이다. 반면, ’ 말을 예쁘게 한다 ‘의 기준을 ’ 그‘에게 두는 것은 그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우선 이해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상황과 포지션에 맞는 말을 구사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즉 말을 잘하는 것이며, 그래서 중요한 것은 ’ 내가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인가 ‘에 대한 고민보다 ’ 나의 내면이 어떠한가, 혹은 상황을 이해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있는가 ‘라는 고민이 먼저이다. 말에 있어서 까다로운 나는 오늘도 말이 많다. 역시 꼰대.
*융(Jung, Carl Gustav) ¹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움. 집단 무의식 주장. 프로이트, 아들러와 함께 3대 정신분석 심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