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HAPS LOVE

-아마도 사랑은

by Sapiens

PERHAPS LOVE

<am.5:50>



중앙로 한편에 있던 커피숍 안, 한 남자가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날 나는 퇴근한 지친 몸이지만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가는 소개팅자리였다.


설렘보다는 조금 피식 미소를 지으며 들어선 커피숍 안에는 누가보아도 저 사람임을 짐작하게 하는 검정 양복을 입은 한 남성이 시선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청바지에 긴 코트차림이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을 만큼 어린 스물세 살의 나이, 재미 삼아 나온 자리였다.


남자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며 너무 성의 없는 모습인지 조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카페 안은 아무도 없었기에 시선 따위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앉아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름을 확인하고는 인사를 한다.


그렇게 우린 처음 만났다. 한 살 차이이니 스물셋, 스물넷의 꽃다운 청춘이었다. 나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그는 취준생이었다.


첫 만남에 식사를 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에도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아직 식사전이지요'라는 말을 건네며 식사하러 가자며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메뉴판에서 음식을 고르다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폭찹이 없네. 그냥 돈가스로 할게요."

하지만 그는 방금 장례식에서 오는 길이라 식사를 시키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럼 왜 여기 오자고 한 거야? 이상한 사람이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후에 그가 말하길 퇴근한 내가 배고플 것을 생각해서 밥을 먹이고 싶었다는 것이다. 속설을 믿고 있던 그는 자신은 굶기로 생각했다고 했다.


그렇게 나 혼자 식사를 하고. 그는 내 앞에서 물만 마시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창을 자리를 비운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자주 체하는 나의 말을 듣고 근처 약국에 가서 소화제를 사고 온 것이다. 수줍게 내미는 모습이 참 순수해 보였던 시절.


그다음 날, 그는 제주에 있는 레스토랑을 뒤져 폭찹을 하는 식당에 나를 데리고 갔다. 전날 레스토랑에서 무심코 내뱉은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시청 근처 레코드집에서 수줍게 뒷짐을 하고 있던 그가 내민 LP판. 존 덴버와 플라시도 도밍고의 'PERHAPS LOVE'라는 노래였다.


그렇게 우린 그날 이후로 6년이라는 시절을 매일 만났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애라는 그릇 속에 이십 대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스물아홉 크리스마스 날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벌써 27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삶의 시간은 서로의 모습도 닮아가고 있었다.


둘이 만나 이제 넷이라는 가족으로 생의 한가운데 와 있다.

그가 내민 '아마도 사랑은' LP판처럼 사랑이란 이런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나온 27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진짜 삶을 살아가게 펼쳐진 시간이었다. 희로애락애오욕. 생로병사로 휘감으며 인생을 좌지우지하며 혼돈 속 고요함을 유지해 주는 묵직한 에너지가 되어주고 있었다. 무심하듯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들이 서로를 지켜주는 무형의 그 무엇이었으리라.


며칠 후면 27주년의 결혼기념일이다. 가장 젊은 날의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야 그가 시선 속에 온전히 들어온다. 그와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랑은 이런 것인가 보다.


마음속 BGM으로 존덴버와 플라시도 도밍고의 PERHAPS LOVE가 캐럴송이 되어 온몸의 빗장을 뚫고 흘러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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