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세상 속으로의 여행
하얀 세상
sapiens
어느 겨울날, 깊은 밤이었다.
어린 수아는 늦은 밤 언니와 함께 어머니의 심부름을 가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그때는 자동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녔다. 한 겨울이라 우리는 여러 겹의 옷을 껴입고 그 위에 잠바와 털 목도리, 그리고 벙어리장갑까지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와야 했다.
그 시절 집 밖 풍경은 어른이 된 수아에게는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겨울이 돌아오면 당시 모습이 다시 살아 움직인다. 그 시절, 그 날 있었던 일을...
그날, 언니와 나선 밤길은 매일 맞이하는 밤길이 아니었다.
전봇대에 달린 불빛이 어두운 밤길을 환하게 밝히기에는 항상 역부족이던 시절,
하지만 그날, 밤길은 나에게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밤이었다.
수아가 10살이 될 때까지 본 적이 없었던 온 세상이 새하얀 밤이었다.
어린 수아의 마음은 여섯 살 터울인 언니와 함께 친척집 근처인 삼성혈에서 돌아오는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어둠이 사라지듯 무서움 또한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함박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어 푹푹 빠지면서 걷는 걸음이 전혀 무겁지가 않았다. 더구나 거리엔 사람들이 없었고, 언니와 나 단 둘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로 한가운데를 맘 편히 휘저으면서 하얀 눈을 감상했다. 내리던 눈은 멈췄지만 나무 위에도, 지붕 위에도, 상점 앞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 위에도 하얀 눈은 넘치듯 쌓여 있었다.
수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앞을 보고 뒤를 돌아보고, 땅을 보아도 온통 하얀 세상이다. 늦은 밤이지만 어두운 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가 지지 않은 백야와는 다른 느낌이다. 수아는 시야가 온통 하얘서 주변 모든 건물들과 근처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까지 하얀 옷을 입어 있는 듯새하얀 공간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심부름을 조심해서 갖다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아무 의미 없는 걱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었다는 듯이 그날 그 밤의 하얀 세상의 공간 속에서 수아는 흩어진 눈을 뭉치고, 뒹굴기도 하고, 뭉친 눈으로 언니를 맞추기도 하며 함박눈과 함께 하나가 되었다.
그때의 눈은 녹지 않았다. 어린 수아는 너무도 신기했다. 눈과 놀다 보니 추위는커녕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벙어리장갑을 벗고 잠바 주머니 속에 넣었다. 따뜻한 하얀 눈을 만지며 촉감을 느꼈다. 장갑을 꼈을 때는 눈이 장갑에 묻었는데, 맨 손에서는 눈이 잘 뭉쳐졌다. 그리고 손바닥이 시원했다.
그렇게 수아는 겨울밤 하얀 세상 속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어린 수아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자녀가 성장한 지금도 그녀는 그 어린 시절 그날의 하얀 세상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전봇대의 작은 불빛에 의지해 살았던 그 시절이 너무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