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가 부담이 될 수도
- 정호승-
작년 여름 입주를 마친 우리 아파트는 00 아파트 사랑방이라는 이름을 내 걸고 입주자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각종 공지사항, 민원, 도서관에서 함께 배우고 싶은 프로그램 들을 공유하기도 하고 이웃들과 무료로 물건을 나누기도 하는 입주민들의 소소한 소통의 공간이다.
지난 4월경 카페에 내가 살고 있는 103동 같은 라인에서 “상추가 많이 남아 농사지은 상추를 좀 드리겠습니다”. 라며 무료 나눔 공지가 떴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금방 가지러 갈 수 있어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며 댓글을 달았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퇴근시간 까만 비닐봉지가 현관 도어에 걸려 있었다. “텃밭에서 손수 기른 상추입니다. 맛있게 드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오우~ 요새도 이런 이웃이 진짜 계시는구나. 너무 감사한걸. 삼겹살을 구워 싱싱한 상추를 싸서 아이들과 맛있게 저녁식사를 했다.
며칠 후 현관 도어에 까만 비닐봉지가 또 걸려 있다. 봉지 속에는 감자 1개, 부추 한주먹, 마늘종 1 주먹, 호박 1개가 담겨 있었다. 역시나 11층 그녀가 걸어 놓은 것이었다.
20년 가까이 시골에서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어 밭작물을 가꾸는 수고로움을 잘 아는지라 넙죽넙죽 받기가 미안해 뭐라도 챙겨주고 싶었다. 집에 있는 구이김 1박스를 11층 현관 앞에 놔 드렸다. 주신 상추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란 쪽지와 함께.
정확히 3일 후 우리 집 현관문에 또 까만 비닐봉지가 걸려있었다.
이번에는 저번에 나눔 한 상추보다 잎이 크고 색이 짙은 어른 상추였다. 이번에도 그냥 먹기가 뭐해서 답례로 오렌지를 한 봉지 사서 건넸다.
9월 초순. 4박 5일 출동을 끝내고 퇴근해서 집에 오니 딸이 말한다.
“아빠 11층에서 주고 가셨어. 맨날 뭘 주시네. 아빠 그 분하고 친해? ”응? 아니 그냥 카페에 상추 드실 분 하길래 손들었을 뿐인데. “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이번에도 상추다. 어쩐다 이번에는 무얼 넣어 드리지 살짝 신경이 쓰였다. 고민 끝에 제과점 롤케이크를 사서 전해드렸다.
곱게 핀 백일홍과 국화
어느 일요일 오후. 피곤해서 잠시 낮잠을 잤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월패드 화면을 보니 낯선 여자다. “안녕하세요? 11층이에요. 뭐 좀 드릴 게 있어서요.” 하며 또 까만 비닐봉지를 내게 건넨다.
“애들 엄마는 안 계신가 봐요?” “새 아파트로 이사하고 조금 적적했는데 언니 동생 하면서 등산도 하고 그럼 참 좋을 것 같아서요. “ 그랬다. 그녀는 소박한 꿈을 꾸고 있었다. 삭막한 아파트에서 대화를 함께 나눌 친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죠? 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갑자기)
“아~ 네. 24시간 교대 근무하는 날이 많아서 얼굴 보기 힘드실 거예요.” 입장이 난처해진 내가 대충 얼버무렸다.
이렇게 인심 좋은 그녀는 석 달 넘게 계속해서 농작물을 시작으로 수제 행주나 세숫비누 까지 끊임없이 뭔가를 가져다주었다. 나 역시 이웃의 따뜻한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주고받고를 계속했다.
나눔이 이렇게 진행이 되다 보니 저쪽에서 뭔가 작은 것을 건네면 나는 답례로 좀 더 큰 것을 드려야 한다는 묘한 부담감이 들기 시작했다. 몇 번을 주고받고 나눔을 하다 보니 이제 그녀와 나의 관계는 단순하게 이웃끼리 선의의 부담 없는 소소한 나눔의 단계를 넘어서 버렸다.
뭐라도 안 챙겨주면 안 될 것 같은 미안함과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낄 정도로 애매한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빚쟁이의 빚 독촉을 받고 있는 형편없는 신용을 가진 불량 채무자처럼.
(그냥 소심한 내 마음이 그랬다)
단풍이 곱게 물들듯 붉게 타는 내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나눔은 계절이 바뀌어도 멈춤이 없었다. 대책 없이 듬뿍듬뿍 손 크게 퍼주는 그녀의 넉넉한 인심 덕분에 냉장고 야채칸은 미처 다 먹지도 못한 채 각종 채소들로 넘쳐났다.
귀한 것들을 그냥 버릴 수는 없고 고민 끝에 옆 단지에 사는 둘째 누나, 민턴을 같이하는 형님들, 단골 빵집 김 사장, 신혼생활을 시작한 직장 후배에게 나눠 주었다.
이제 상추를 포함한 채소들은 수요가 공급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해 시들고 물러서 버려야 할 것들이 점차 많아졌다. 그만 주셔도 된다고 얘기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이없는 일로 고민하며 맘고생을 하며 한 달을 보낸 것 같다. (이것은 행복한 고민일까?)
한동안 그녀의 나눔이 잠시 뜸하더니 10월에 접어들면서 다시 시작됐다. 고구마와 무 몇 개를 까만 봉지에 넣어서 문 앞에 걸어 두었다. 오늘은 또 무엇을 답례로 드려야 하나?
이제 적어도 나에게 그녀의 채소들은 이웃 간의 부담 없는 마음을 나누는 본래 목적을 잃어버린 일종의 말 못 할 채무 행위로 변질된 것은 확실해졌다. (나눔이 부담이 될 수도 있음을 진정 난 몰랐네 )
그것이 받는 내 마음이 변했거나 이웃의 순수한 마음을 온전히 끝까지 받아주지 못하는 속 좁은 옹졸함 탓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동안 나눠 주신 상추가 너무 많아 미처 다 먹지 못해 버린 것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 내 곁에는 아내가 없어 같이 등산을 갈 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그녀의 곱고 따뜻한 마음이 상처 받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이실직고할 적절한 타이밍을 엿보고 있다.
마치 상대방 골키퍼를 앞에 두고 페널티킥을 차기 위해 떨고 있는 축구선수처럼.
오늘 퇴근길에도 그녀의 까만 비닐봉지가 걸려 있으면 어떡하지?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싸고 있구나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