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어느 봄날의 기억 한 조각
산불이라는 괴물이 찾아왔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앞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산불이다. 흰 연기는 어느새 검은 연기로 바뀌었다. 마른풀과 나뭇가지만을 태우다 곧이어 한 무리의 소나무와 겨우내 진을 짜낸 송진도 함께 탄다는 뜻이리라. 산새들이 “앗! 뜨거워”하며 달아난 자리에 잠자리비행기가 날아든다. 여러 대이다. 산불진화가 사람 힘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이리라. 오래간만에 임대해온 헬리콥터들이 제 몫을 한다. 근처 연못도 바짝 마른 지가 벌써 여러 날이 됐는데도 그 헬리콥터는 어디서 물을 빨아들여 나르는지 잠자리비행기의 배가 산달이 된 노루의 배보다 더 불룩해 보인다.
87년 봄이다. 나는 전역을 두 달여를 앞두고 있었다. ‘껌도 씹지 마라’,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다녀라’는 제대 말년 병장이었다. 행정반 서무계로 외출, 외박증을 주무르고 보초 명단을 짜고, 유격훈련도 열외를 받을 만큼 군대생활의 호사를 다 누린 말년 병장이 조수까지 받아 업무를 다 가르친 터라 말 그대로 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때다.
방공 초소 옆에 평상까지 만들어 낮잠을 자고 있는데 잠결에 잠자리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왕 잠자리였다. 처음에는 두 마리가 날아다니더니 이번에는 3,4마리로 늘었다. 비행 솜씨가 영 서툴렀다. 아니 엉성했다. 전쟁을 하라고 만들어 놓은 비행기를 산불을 끄는데 동원했으니 축구선수에게 모자와 글로버를 끼워 놓은 듯 안 어울린다. 사랑을 나누는 잠자리 모양으로 배 밑에 줄을 매단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 그래 너희는 열심히 날아다나며 불을 끄라. 제대 말년인 나는 낮잠이나 잘 란다”
나는 애써 눈앞에 벌어진 난국을 외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솟아오르는 연기로 보아서 불은 내가 근무하고 있는 부대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 분명했다.
낮잠도 한계가 있게 마련. 1,2시간 눈을 붙이고 나면 담장 넘어 민간인 아가씨들도 궁금하고 아침나절 피려고 채비를 서두르던 꽃들도 궁금한 법.
한낮의 볕이 수그러들 즈음 부대 내에 갑자기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이 사이렌은 적이 부대 내에 침투했거나 침투가 임박했을 때 내리는 비상 신호였다. 헌대 적의 침투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휴전선에서 100여 리나 떨어진 곳에 적이 침투했다면 그 앞의 부대는 전멸을 했어야 하는데, 적어도 총소리가 콩 볶는 듯은 해야 하는데 그런 소리는 없었으니...
시야가 탁 트인 대공초소에서 부대 전역을 바라보던 순간 총알을 합방 맞은 듯 억!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오전에 발생한 산불이 진화되기는커녕 무서운 기세로 우리 부대 쪽을 향해 번져오고 있었다. 그것도 탄약고를 향해...
아무리 제대 말년이라고 해도 적보다 더 무서운 화마가 침투해 들어오는데 넋을 잃고 가만히 있을 대한민국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며칠 만에 행정반에 얼굴을 내밀자 부임 1주일이 채 안된 포대장과 갓 일병 계급장을 단 나의 조수는 신혼 첫날밤을 기다리는 색시처럼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내게 언제 그런 여유가 있었던가? 쪽지에다가 금세 몇 가지를 메모해 포대장에게 전달했다.
전투는 포대장이 잘하겠지만 평상시 안전사고와 화재 대처 능력은 그곳에서 오래 생활을 한 선임병사가 나은 법.
5분 대기조의 무장을 산불 진화장비로 대처해 대기시키고 전 병력을 집결시킨 후 신참 소대장과 선임 병장을 한조로 편성, 6개소의 탄약고에 방호벽을 구축토록 했다.
만약 탄약고를 지키지 못한다면 수천발의 다련장 로켓 포탄이 폭발하는 그야말로 비극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경각심과 함께 병력은 깊은 산중에 위치한 탄약고를 향해 달려갔다.
아뿔싸 바람의 방향이 남쪽으로 난 탄약고 입구를 향해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나보다 2살이나 어린 신참 소대장과 한 조를 이뤄 최고 높은 지대에 위치한 마지막 6번째 탄약고 방호에 나섰던 우리 소대원들은 모두들 화마에 갇힌, 물에 빠진 생쥐가 아닌 불에 갇힌 대한민국 군인이 됐다.
사색이 된 소대장에게 더 이상 소대원들의 지휘를 맡길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내 머리에는 오전에 본 그 잠자리비행기가 퍼뜩 떠올랐다. 무전으로 긴급히 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잠시 후 한 마리의 잠자리가 다가와 우리 소대원들의 상황을 정찰하고 돌아갔다.
그때서야 소대장 왈 “ 탄약고는 죽어도 사수해야 돼!”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죽기는 왜 죽어. 내일모레면 제대할 말련 병장이 여기서 죽으면 말이 안 되지, 그럼 우리의 영화는 끝나는 거지...
무전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소대장, 화벽을 설치했으면 병사들을 피신시켜라. 헬기에서 떨어지는 물의 압력이 총알보다 더 강하다”
아직 탄약고 입구에 화벽을 다 설치하지 못한 우리 소대원들 대부분은 남아 마지막 흙 포대를 쌓았다. 잠시 후 하늘에서는 물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려 6마리의 잠자리들이 날아와 물을 퍼부었다. 헬멧 위에 떨어지는 물은 정말 총알과 같은 위력이었다. 곧 모두는 혼비백산이 됐다.
우리 소대원들은 총알이 날아오는 전투가 아니라 물벼락이 날아드는 전투를 치렀다. 그것도 30여분 간을...
전투 결과는 처참했다. 화벽을 참호로 삼아 피신한 덕에 28명 중 20명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는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전사자(?)는 없었다 몰론 탄약고도 말짱히 지켜냈다.
나의 군 생활 마지막 서무계 업무는 공적조서를 꾸미는 일이었다.
다음날 오후 어깨에 별이 3개나 달린 군단장님이 달려와 신참 소대장에게는 참모총장 표창을, 나머지 20여 명의 동료 병사들에게는 순차적으로 출발하는 휴가증을 수여했다.
“김 병장이 표창을 받아야 하는데...”라며 멋쩍어하는 소대장에게 나는 말했다
“소대장은 군대생활 많이 해야 하고 특히 진급을 해야 하잖아. 나는 내일모레면 예비군 아저씨가 되는데...”
나의 어느 봄날의 기억 한편에는 산불을 진화하기 위해 날아다니는 잠자리가 있다.
함께 위기를 넘기며 고생한 전우들이 있다.
*이 글은 매일신문 주최 안전글짓기 공모에서 입상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