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숲 이야기(7) 숲이 날보고 오라 하네

숲은 치유의 종합병원이다

by 연오랑


처갓집으로 가는 길은 사철 표정이 다르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또 더 가파르고 긴 고개가 얼굴을 내민다. 간혹 고라니가 나와 내 눈과 마주치면 부끄러움을 탄 녀석은 암내마저 거두지 못하고 사라진다.

우선 대청호라는 바다 같이 넓은 호수의 한 자락을 돌아야 한다. 옥천 팔경이라는, 8폭은 족히 되어 보이는 병풍바위가 있어 화객들과 영화감독의 헌팅 장소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가을이면 단풍이 조금 관록이 붙었다는 화가가 그린 그림보다 더 화려하다. 단풍놀이를 제대로 해보지 못한 도시민들에게는 여기가 금강산이다.

그 길 정상에 오르면 저 멀리 대청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20분이면 지나는 길을 나는 지날 때마다 대략 30분은 더 잡는다.

지금까지의 길은 연극으로 치면 서막에 불과하다. 뱀이 기어 다니며 내놓은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면 곧 5 리 숲길이 나타난다. 금빛 침엽수의 그 길을 나는 첫 만남에서 ‘파라다이스 길.이라 이름 지었다. 그 길의 입구에 들어서면 나는 언제나 차에서 내려 그곳 공기를 마음껏 흡입한다. 폐를 치료해야 하는 환자는 아니지만 도시의 오염된 공기만 맛 보여준 내 무성의가 미안해 지친 폐에게 그리고 더 주름이 잡힌 뇌에게 공기 비타민을 선사한다. 걸어도 30여분은 족히 걸리는 이 길을 나는 암스트롱이 달 표면을 걷듯 조심스럽게 걷는다. 처갓집 마당에 들어 설 때면 딴전을 부리다 온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 길은 내게는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길이다.

부부간에도 비밀은 있는 법이다. 눈만 뜨면 향상 옆에 있어 비밀이 없는 듯 여겨지지만 20년을 넘게 살다 보면 비밀 하나쯤은 있다. 아이들이 커가고 경제적으로 압박을 느끼는 50줄에 접어들면 그 비밀은 더 많아지고 커지게 마련이다.

벌서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사업하는 친구에게 서준 보증이 잘못돼 길바닥에 나 앉을 위기에 처했다. 집에는 집달리가 붙여놓은 붉은색 딱지가 세간살이들에 예외 없이 붙은 것은 물론이고 유명세를 타고 있던 화가 친구가 결혼 선물로 준 그림에까지 딱지가 붙은 모습은 생채기 난 내 체면에다 소금을 뿌린 듯했다.

그즈음 나는 울화가 치밀 때마다 혼자 차를 몰아 100여㎞나 떨어진 그 길로 달려가곤 했다. 머리가 아프다가도 그 숲에 들어서면 머리가 맑아지던 경험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장인 장모님 눈에 띌까 멀찌감치 차를 세워두고 그 숲길을 거닐었다. 때로는 혀를 날름 내밀고 조롱하듯 도망치는 청설모도 보였고 때로는 금도끼를 들고 나타난 산신령의 호통 소리도 들렸다. 두어 시간 뒤면 언제나 답답함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그런 숲길이 었다.

그날도 정신없이 차를 몰아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그곳에 도착했다. 마치 꼴인 지점만 생각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뛴 마라토너처럼 숲이 처 놓은 그림자 테이프를 끊었다. 시장 끼를 느낀 순간 뒷좌석에는 집사람이 정성껏 싸 놓은 김밥 도시락과 따끈한 커피가 든 보온병이 놓여 있었다. 비밀이 탄로가 난 것일까? 설마 어디로, 왜 가는지는 몰랐겠지?

얼마나 거닐었을까? 그날따라 온갖 상념에 젖은 나는 노을이 지는 줄도 모르고 숲길을 걷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차엔 실려 있던 텐트로 인근에서 야영을 하며 밤을 지낸 나는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뜨고 새들이 목청을 돋울 때서야 일어났다. 안경도 찾지 못해 희미한 눈에 미끄러지듯 숲길로 접어드는 승용차 한 대를 발견했다. 그 차 속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하루 종일 머릿속에 맴돌았던 집 사람이었다.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은 터라 밤새 내가 별을 쳐다보며 잠을 못 이루었듯이 시계만 쳐다보다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불길한 생각을 떨치며 친구 차를 빌려 서툰 운전 솜씨로 달려온 집사람의 얼굴빛은 백지장 그 자체였다.

우리는 그날 한참이나 그 숲길을 더 거닐며 숱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예시절 즐거웠던 기억만을 떠올리려는 듯 집사람은 그날따라 옛날이야기만을 골라 신방 차린 새들보다 더 제잘 거렸다. 평소와 달리 많은 말을 쏟아내는 아내의 뜻이 무엇인지를 눈치챈 나는 그때마다 손을 꼭 잡는 것으로 답했다.

그 뒤 5년 여가 지난 어느 날 우리 부부는 그 숲을 지나 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 숲길 양지바른 비탈면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이름 모를 새들은 축가를 불러주며 우리를 환영했다. 그 숲 속 소나무는 내가 토해 내던 넋두리 같은 언어를 양분 삼아 자란 탓에 줄기가 굽어 있었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도열하듯 서있는 소나무, 그 뒤에서 얼굴을 내밀며 겨우 터를 잡은 키 낮은 상수리나무, 모두들 축복하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숲은 그대로였지만 그 숲을 걷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는 그동안 작은 변화가 있었다.

집사람에게 찾아온 변화였다.

집사람은 몇 해 전 숲에서의 일이 생각났는지 지난해부터 숲해설 공부에 열중해 올봄 숲해설가 자격증을 땄다. 전국 숲해설가 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차지하더니 지금은 포항과 경주는 물론, 인근 영덕과 울진지역까지 오르내리며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갱년기를 맞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숲길 산책이 가장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도 숲 해설을 하면서 숲이 가져다주는 행복, 그리고 치유의 효과를 널리 알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집사람은 간혹 20여 년 전의 우리가 겪었던 위기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치밀어 오르던 울분을 차분히 가라앉혀준, 숲이 가져다준 선물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누구를 만나도 숲길이 가져다주는 효용성을 설명하는 전도사가 됐으며 한때 나약했던 우리 부부의 영혼을 치유한 사실도 부끄럽지만 털어놓는다.

요즘은 아내 모르게 그 숲길로 달려가는 일이 없어질 만큼 생활의 안정을 되찾았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용기와 평안을 주던 그 치유의 숲길 어딘가를 거닐고 있다. 세상에서 받은 선물 중 숲 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우리 부부는 오늘도 숲을 알리고, 숲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전하려 뛰어다닌다.

숲은 내게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종합병원이요, 그 숲 속 나무 한그루 한그루는 유능한 의사 선생님이다.

이 글은 2015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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